여백의 날: '여백'이 뭔가요?

사유와 멍때림, 그리고 일상의 여백

byItz토퍼
※ 본 글은 이후 발행할「사유의 자리, 그리고 일상」의 도입부입니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떠오른 사유를 날 것 그대로 독자 여러분과 함께 ‘여백’을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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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여백, 그리고 생각의 생략 : 멍때림이라는 온전한 쉼표에 관하여


길을 걷다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저 사람은 지금 아무 생각이 없군.”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멍하니 있는 순간, 우리 뇌는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일까?


달리던 자동차가 신호등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고 해서, 그 자동차가 달릴 수 없는 고장 난 차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 생각도 마찬가지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내면에서는 기억과 감정, 상상과 연상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일 뿐, 사유는 여전히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생각이 제대로 사라지는 순간은 따로 있다.

그것은 생각이 잠시 멈춘 상태가 아니라, 생각이라는 과정 자체를 '건너뛰는' 순간이다.


즉, 마땅히 거쳐야 할 사유의 과정을 생략한 채, 오직 '반응과 행동'의 자동문만 통과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상태는 흔히 일상의 반복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행동에는 굳이 생각이나 사고라는 복잡한 단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 걷는 출퇴근길을 떠올려 보라. 굳이 이정표를 확인하거나 길눈을 밝히지 않아도 몸은 알아서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이는 이미 정해진 판단 속에서 우리가 자동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역시 생각이라는 존재를 납작하게 압축해 버린다.


극도의 분노나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도 모르게 그랬다”라고. 실제로 그 순간만큼은 행동이 생각보다 먼저 일어난다. 이성이 행동을 한 박자 늦게 깨닫는, 즉 '지각'하는 셈이다.


결국 사유가 행동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엎질러진 행동을 이성이 뒤늦게 쫓아가며 수습하고 해석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조건적인 반응보다 우리의 사유를 더욱 교묘하게 멈추게 만드는 주범은 따로 있다. 바로 ‘확신’이라는 존재다.


최근 기승을 부리는 스팸 문자나 피싱 사기 수법들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런데 그 함정에 빠져드는 결정적인 계기는 결코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분명 ‘내 아들’이라는 단 하나의 강력한 확신이 드는 순간, 인간의 뇌는 의심하기를 딱 멈춰버린다.


스스로를 모텔 방에 감금하면서까지 사기범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믿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도 바로 이 ‘확신’ 때문이다. 사기범의 말이 백 퍼센트 사실이라고 믿는 순간, 다른 가능성을 열어둘 의심의 통로가 완벽히 차단되는 것이다.


사람은 의심할 때 비로소 생각을 시작한다. 반대로 ‘당연하다’고 믿는 순간, 사고의 스위치는 즉시 꺼져 버린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사유 역시 설 자리를 잃는다. “왜 그렇지?”, “정말 그럴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순간, 인간은 가장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생략해 버리고 만다.


따라서 멍때림은 생각을 멈춘 위험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마음에 꼭 필요한 사유의 따뜻한 여백에 가깝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침묵하는 머리가 아니다. 오히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익숙함과 확신의 상태다. 우리의 사유는 고요함 속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 속에서 조용히 생략되곤 하기 때문이다.


오늘 쉼 없이 흘러가는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지금 무엇이 당신의 사유를 생략하게 만들고 있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사유 스위치가 꺼진 채 그저 관성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 할 때다.



“오늘의 여백을 이렇게 채웁니다.”


새벽 3시, 청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와 아직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이 글을 다듬었습니다. 삶 속에 여백이 그러하듯, 시간이 만들어준 여백 또한 이렇게 조용히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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