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는점은 낮고 심지는 가벼워서야
해외에서 30여 년을 살다 보니, 친한 친구와 지인은 대부분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다. 물론 나 역시 그들에게는 한 사람의 외국인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국적을 물으면 농담처럼 “지구인”이라고 답하곤 한다.
이러한 상황은 때때로 특별하게 다가온다.
일상에서 한국인을 마주할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오히려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존재를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자주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냉탕과 온탕을 들락거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외국인의 시야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때로 흥미롭지만, 때로는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통증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K-컬처의 눈부신 약진에 찬사가 쏟아지는 오늘날에도, 그 화려한 조명 이면에는 여전히 싸늘하고 냉정한 시선이 존재한다.
나는 국가관에 있어 진보적 보수(정치적 보수와는 무관)이며, 스스로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라는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을 때, 우리 세대가 짊어진 과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물론 그로 인해 내 인생에서 커다란 변곡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외국 친구들이 한국인을 두고 ‘성질이 급하다’, ‘기회주의적이다’, 혹은 ‘비겁하다’는 식의 날 선 평가를 내릴 때면, 나는 본능적으로 강한 반발심을 느끼며 우리를 변호하곤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지인들과의 대화 도중 한 친구가 던진 질문은 나의 그 견고한 방어기제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는 한국 슬롯의 어떤 면모를 설명하며 ‘Prone to knee-jerk reactions’라는 표현을 꺼냈다.
의학적으로 ‘무릎 반사 반응’을 뜻하는 이 말은 의사가 망치로 무릎을 칠 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이 튀어나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가 이 단어를 내뱉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깨달았다. 우리가 스스로를 향해 던지던 자조 섞인 비유인 ‘냄비근성’의 지독하리만큼 정확한 영어식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의 지적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입맛이 씁쓸해졌고, 이내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것은 단순히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불쾌함이 아니었다.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그리고 그 비겁하고 가벼운 흐름 속에 나 역시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급변하는 한국 슬롯의 속도는 실로 경이롭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변화’의 본질을 천천히 되짚어볼 여유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몇 년 만에 고국을 찾을 때마다, 빠르게 바뀌는 유행과 풍경 속에서 익숙해야 할 것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마치 해외여행지 한복판에 서 있을 때와 비슷한 이질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낯섦은 머지않아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곤 한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열광하고, 또 얼마나 쉽게 소중한 것들을 지워버리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처럼 다가온다.
오랫동안 우리를 상징해 온 이 ‘냄비근성’은 한때 역동적인 성장의 동력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이 열기는 건강한 에너지를 넘어, 타인을 의식하는 허영심과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비겁함이 기묘하게 뒤섞인 형국이다.
나는 이제 이 아픈 현실을 성찰의 거울 앞에 비추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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