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쓰는 사람과 자신을 쓰는 사람, 그리고 서로에게 닿는 글
※ 이 글 가운데 첨부한 두 삽화에는 글과 맞닿아 있는 또 하나의 알레고리를 담아두었습니다.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즐거움은,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의 몫으로 남겨두도록 합니다.
내 글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내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바로 알게 된다.
어떤 글이든 심리학과 철학적인 용어나 내용이 많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다. 내 일상과 생각, 그리고 이를 풀어나가는 사유 가운데 항상 공부하고 연구했던 학문이 필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 모두는 어쩌면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동안 무얼 하던 사람인지가 모두가 쓰는 글의 필터 역할을 하고 있다.
글쓰기 플랫폼에서도 마찬가지다.
피드를 오래 넘기다 보면 비슷한 풍경이 반복된다. 남성 작가의 글에는 『왜 한국 온라인 게임 문화는 바뀌지 않는가』 같은 제목이, 여성 작가의 글에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울컥했던 날』 같은 제목이 상대적으로 자주 눈에 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관찰한 하나의 경향일 뿐, 남성과 여성의 글을 나누는 기준은 아니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맡아온 역할, 슬롯적 경험에 따라 그 모습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슬롯를 날카롭게 이야기하는 여성도, 자신의 내면과 일상을 깊이 들여다보는 남성도 많다.
그러니 이를 남성과 여성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구분이라기보다, 글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경향과 방향성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
그런 차이를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한쪽은 세상을 말하고 다른 쪽은 세상 속의 ‘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차이가 단순히 취향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달라도, 그 밑에는 결국 같은 마음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다만 그 마음을 꺼내놓는 통로가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며 익혀온 필터가 다를 뿐이다.
익숙한 언어가 다르다
심리학에는 사람이 자기를 세우는 방식을 '주체성'과 '관계성'으로 나누는 오래된 구분이 있다.
무언가를 이루고 분석하며 세상에 자리를 만드는 방향, 그리고 누군가와 이어지고 마음을 나누는 방향이다.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두 축이다. 슬롯는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 이 둘을 조금씩 다른 비율로 쥐여 준다. 남자아이는 "씩씩해야지", "울면 안 돼"를 듣고, 여자아이는 "착하다", "얼굴도, 마음도 예쁘다"를 듣고 자란다.
슬롯적 역할 이론은 그 칭찬이 어른이 되어 역할로 굳고, 오래 맡은 역할이 성향처럼 보이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남성이 슬롯를 논하고 여성이 일상을 쓰는 건 타고난 차이라기보다, 각자에게 익숙한 언어가 달라서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은 대개 자신 내면의 가장 무거운 곳을 향해 글을 쓴다.
제임스 페니베이커는 사람들에게 하루 15분씩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을 써 보게 했고, 며칠 뒤 글쓴이들의 마음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고 보고했다. 무엇에 대해 쓰는가는 곧 무엇이 그를 누르고 있는가와 닿아 있다.
남성의 무게는 대체로 밖에 있다.
한국에서 '가장'이라는 말은 지위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빚과 같다. 내 월급에 가족의 안정이 달려 있다는 감각, 회사에서 쌓인 모욕을 집에서는 꺼내지 않는 습관.
이런 피로는 개인의 감정으로 정리되기 전에 '구조의 문제'로 먼저 느껴진다. 내가 힘든 게 아니라 이 조직이, 이 직종이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슬롯 이슈 글은 안전하다. 틀려도 "분석이 틀렸다"는 말을 들을 뿐, "너라는 사람이 틀렸다"는 말은 듣지 않는다.
심리학자 로널드 레번트는 많은 남성이 감정을 느끼면서도 말로 옮기는 데 서툴다고 했다. 이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훈련의 결과다. 그래서 분노는 '조직 문화 비판'으로, 외로움은 '관계 단절의 시대'로, 인정받지 못한 서러움은 '능력주의의 허상'으로 바뀌어 나온다.
개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오히려 또렷하다.
다만 논리라는 외투를 걸치고 있을 뿐이다.
여성의 무게는 대체로 가까이에 있다.
슬롯학자 앨리 혹실드는 온라인 게임에서 돌아온 여성에게 '두 번째 근무'가 기다리고 있다고 썼다.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집 안 정리와 가족 각자의 기분을 살피는 돌봄의 일들이다. 월급명세서에도 인사평가에도 적히지 않고, 다 해 놓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다가 하나라도 빠지면 그제야 드러나는 일이다.
언어학자 데보라 태넌은 말에는, 대화에 정보를 전하는 '보고의 말'과 친밀감을 확인하는 '관계의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여성의 글에 일상과 가족, 사소한 감정이 많은 건 그것이 곧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이가 처음으로 내 손을 놓고 걸었다"는 문장은 정보가 아니라 초대장이다.
이때 인정 욕구는 "내가 옳다"가 아니라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확인으로 향한다. 댓글 창에 "저도 그랬어요"가 줄줄이 달리는 공감이 그래서 나온다.
여기에도 그림자는 있다. 슬롯 이슈 글이 비판받으면 의견이 공격받지만, 육아 일기가 외면받으면 삶 자체가 외면받는 것 같다. 그래서 "별것 아니지만", "소소한 이야기지만"이라는 방어 문구가 먼저 달린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갈라지는 걸까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물러서야 한다.
심리학에서 확인되는 성별 차이는 대부분 작고, 개인 간 편차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자기 이야기를 깊이 쓰는 남성도, 슬롯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여성도 얼마든지 있다. 일과 가정을 모두 짊어진 여성이 많고, 돌봄을 도맡는 남성도 늘고 있다.
내가 본 건 보편적인 글쓰기 플랫폼의 일부일 뿐이다. 앞으로 시간이 흘러가면 짐의 배치가 달라지게 되고 글의 풍경도 분명 달라질 것이다.
같은 갈증,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짐
우리 모두는 비슷하게 인정받고 싶다. 다만 그 마음을 꺼낼 언어가 다르게 허락되어 왔고, 마음을 누르는 짐도 다른 곳에 놓여 있었다. 한쪽은 어깨 위의 짐을, 다른 쪽은 손에 쥔 짐을 내려놓으려는 중이다.
세상을 말하던 남성이 "사실 그 글을 쓴 날,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라고 한 줄만 보탤 수 있다면. 일상을 말하던 여성이 "내 경험을 근거로 세상에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라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그때 글은 서로의 언어를 건너는 다리가 된다.
내가 플랫폼에서 피드를 넘기다 문득 멈추게 되는 글은 대개 그런 글이다. 세상을 말하면서도 쓴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읽는 사람의 세상 이야기 같은 글.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모두의 글이 세상과 개인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서로의 다리까지도 놓아주면 좋겠다. 그러면 세상 이야기 속에서 나를 만날 수 있고, 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 속 우리 모두가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어제의 글] "글을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