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피자 세이버
분명 봄이라고 했는데 어쩐지 춥다. 찬 바람에 코트 깃을 여민다.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공허한 마음은 깊고 커다란 동굴이 되어버린다. 한 발자국 가만히 밟아도 그 소리가 천지에 쩌렁쩌렁 울릴 것만 같다.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 나를 완벽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괴롭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텅 비어버린 날에는 괜히 후루룩 코코아를 마시고 싶다. 집에서 나올 때 목도리를 하고 나올 것을 그랬나 보다. 겸연쩍은 얼굴로 목 주변을 만져본다. 일교차가 심해서 그런지 주변에 감기 걸리는 사람이 많네. 감기를 꼭 조심해야 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아프기까지 할 수는 없지.
최근 나는 주 3일, 오전에 짧게 근무하는 피자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 나이 먹고 아르바이트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라도 먹고살아야 한다. 피자집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던 날, 베트남 국적의 어린 여성이 내 면접을 봤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이는요?" 피자집 일을 하는 데에 별 다른 이력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말이 어쩐지 산뜻하게 느껴졌다. 내가 하게 될 일은 '피자 박스 포장'이라고 적혀있어서 피자 박스만 접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보조 업무 전체를 맡아해야 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손 끝이 야물지 못해 죄다 엉성했다. 재료를 손질하는 것부터 랩 싸는 것, 피자 위에 토핑을 얹는 것, 배달원에게 포장한 피자를 건네는 것, 피자 박스를 접는 것.... 엉성한 상태로 매니저를 따라 하던 아르바이트 첫 번째 날. 나는 실수를 했다. 피자 세이버를 깜빡하고 꽂지 않은 상태로 배달을 보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 컴플레인은 없었지만.
피자를 시켜 먹으면 반드시 딸려오는. 그 다리 세 개 달린 그것. 그것이 ‘피자 세이버’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 이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피자를 살리는 것이다. 배달하는 동안 피자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주기도 하고, 습기 찬 피자 상자의 윗부분이 증기로 내려앉아 토핑을 덮치지 않게도 한단다.
당신의 세이버는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세이버는 코코아다. 후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