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돌이켜보면 참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다. 유약하고 병약했던 탓에, '이 녀석이 언제 세상을 등질지 모른다'는 부모님의 서글픈 예감은 내 출생 신고마저 늦추게 만들었다. 활기차게 뛰어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몸은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유난히 많은 사건 사고를 불러들였다. 아무 이유 없이 평탄한 길을 걷다 제 발에 걸려 넘어져 앞니가 부러졌던 일은, 내 생의 궤적에 기록된 첫 번째 추락의 기억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범인은 신발 등 위로 무심히 풀려 있던 운동화 끈이었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찰나의 본능으로 손을 짚어 손바닥을 조금 까이는 정도로 끝냈을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방비도 없이 얼굴로 낙법을 펼쳤고, 입속에 조용히 머물던 앞니는 고스란히 그 충격을 대신 받아내며 희생양이 되었다. 다행히 새로운 이가 그 자리를 메웠지만, 웃을 때마다 영구처럼 비어 있던 앞니는 중학교에 가기 전까지 나에게 '땡칠이' 혹은 '맹꽁이'라는 시린 별명을 안겨주었다. 단지 신발 끈 하나를 밟았을 뿐인데 6년의 세월을 별명 뒤에 숨어 살아야 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억울하고 서글픈 소년사의 한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신발을 신을 때마다 습관처럼 끈을 다시 조인다. 단단히 묶인 매듭을 확인하는 순간마다, 부러졌던 앞니 자리에선 해묵은 시큰거림이 다시금 살아나곤 한다.
멀쩡하게 걷다 마주한 사고는 그 뒤로도 수풀처럼 무성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큰 시련은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어느 등굣길에 찾아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실내화 주머니를 하늘 높이 던졌다가, 그것을 받기 위해 고개를 젖힌 채 뛰어갔다. 하늘을 쳐다보며 달리던 발은 운동장에 돋아난 1.5cm 남짓한 작은 턱을 보지 못했다. 그날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으나, 이튿날부터 다리는 내 의지를 배신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몇 주 전에도 작은 실수로 다리를 다쳤던 터라, 차마 또 다쳤다는 말을 부모님께 꺼내지 못했다. 집안 어른들은 속절없이 부어오르는 내 다리를 보며 이 가녀린 아이가 혹 불치병이라도 얻은 것은 아닌지 깊은 수심에 잠겼다. 실내화 주머니를 던지며 놀았던 철없는 장난의 대가는 가혹했다. 결국 수술대에 올랐고, 두 달이라는 긴 시간을 병원 침대 위에서 보내야 했다. 무릎을 지나는 혈관이 파열되어 응급 수술을 받는 동안, 나는 매일 치킨을 사달라며 부모님을 졸랐다. 못 먹여서 아이가 유약한가 싶어 가슴을 쥐어짜던 부모님은 매일같이 노란 봉투에 담긴 치킨을 날라주셨다. 덕분에 몸은 불어났지만, 그 뒤로도 넘어지는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부모님 역시 치킨이 문제가 아니었음을 머지않아 직감하셨을 듯 하다.
열한 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도 나의 수난은 멈추지 않았다. 집 앞 길모퉁이를 돌아 나가던 중, 자장면을 배달하던 동네 형과 정면으로 충돌해 머리가 터지는 사고를 겪었다. 길 위에 쓰러진 나를 배달 형이 안고 병원으로 달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찢어진 곳을 꿰매던 의사 선생님에게 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머리 안에 딱딱한 것이 붙어 있어요." 바닥에 부딪히며 이물질이라도 박힌 것이 아닐까 두려웠던 내 질문에, 선생님은 덤덤하게 대답하셨다. "응, 그거 너 머리뼈야." 그 순간, 나는 내가 가진 연약함의 실체를 물리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면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될 것이라는 집안의 기대는 겨울방학 보충수업 길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날은 애쓰시는 선생님을 위해 보온병에 따뜻한 차를 담아 가던 길이었다.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조심조심 '펭귄 걸음'으로 얼어붙은 학교 길을 향했다. 당시의 보온병은 안쪽이 진공관 형식의 유리로 되어 있어 충격에 취약했다. 집을 나선 지 3분도 채 되지 않은 골목에서 나는 첫 번째로 고꾸라졌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제설 작업이 철저하지 않았다. 눈이 내리면 인도는 거대한 스케이트장이 되었고, 자기 신발 끈을 밟고도 넘어지는 나에게 그 길은 만화 같은 재앙의 연속이었다. 선생님께 따뜻한 차를 전해드리겠다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나는 세 번을 넘어졌다. 가장 큰 고비였던 육교는 네발로 기고 엉덩이로 내려오는 추태를 보이며 겨우 건넜지만, 정작 방심했던 곳은 학교 정문 앞이었다. 꽁꽁 언 얼음 위로 살포시 쌓인 눈은 만화 속 연출처럼 나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정문 옆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보온병만은 무사하리라 믿었지만, 선생님께 따라드린 잔 속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차가 뒤섞여 비극적인 막을 내렸다.
넘어지고 다치는 나날들이 일상이었으나, 기억 속 '길'에 대한 가장 깊은 두려움은 시장과 집 사이에 흐르던 개천의 나무다리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범람할 듯 세차게 흐르는 물살도 무서웠지만, 어린 나의 보폭보다 훨씬 넓게 벌어진 나무 판재 사이의 틈을 건너는 일은 숨이 멎을 듯한 공포였다. 옆 동네 개천으로 떨어졌다가 주민의 손에 가까스로 구조되었던 기억은 그 공포의 밑바닥에 단단한 트라우마를 심어 놓았다. 개천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집안 어른들의 짓궂은 농담조차 당시의 나에게는 서러운 수모로 다가왔다.
초등학교 입학 전 어느 날, 나는 생애 첫 심부름을 맡게 되었다. 참깨 한 봉지, 참기름 한 병, 소고기 한 근.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품목 하나하나가 생생한 이유는 그날의 공포가 그만큼 선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 바로 앞에는 듬성듬성한 나무다리가 있었지만, 나는 조금만 더 걸어가면 있는 콘크리트 다리를 믿고 있었다. 심부름값으로 받을 잔돈으로 무엇을 사 먹을까 고민하던 설렘도 잠시, 복개천 공사로 인해 믿었던 큰 다리는 이미 뜯겨나간 상태였다.
길을 건너려면 아주 먼 동네를 돌아가거나, 집 앞의 그 위태로운 나무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물건 살 돈을 검은 비닐에 넣어 허리춤에 꽁꽁 싸맸다. 잔돈을 향한 물욕이 공포를 압도했던 모양이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러나 건너기에는 너무나 위험해 보이는 간격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다리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빠져 있는 판재 너머로 흐르는 물살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물욕은 순식간에 휘발되었고, 나는 다리를 잇는 밧줄을 붙잡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울었을까. 나무다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공황 상태에 빠져 본능적으로 엄마를 불렀다. 그 순간, 떨리는 내 손 위로 따뜻한 온기가 덮였다. 절망의 끝에서 어머니의 손이 나를 붙잡은 것이다.
"많이 무서웠니?"
심부름 보내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뒤를 밟으셨던 것인지, 아니면 늦어지는 아들을 찾아 급히 달려오셨던 것인지 지금도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절망적인 순간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셨다. "눈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거짓말처럼 마음이 진정되었다. 숨이 고르게 돌아오자 비로소 보였다.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넓은 틈도 밧줄을 딛고 조심스레 발을 뻗으면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한 손을 잡아주었기에 나는 그날 생애 처음으로 그 두려운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눈물과 콧물, 땀으로 뒤범벅이 된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방앗간에서 참기름과 참깨를 사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샀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내가 스스로 다리를 건너 장을 봐왔다며 아버지 앞에서 나를 한껏 치켜세워주셨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부끄러운 기억을, 어머니는 칭찬과 긍정의 역사로 바꾸어주신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복개천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 다리를 하루에도 수없이 오갔다. 처음엔 한 칸 한 칸이 조심스러웠지만, 어느덧 그 길은 뛰어다닐 수 있는 익숙한 터전이 되었다. 삶을 살아가며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길을 대하는 자세를 나는 그날의 공포 속에서 배웠다. 걸려 넘어지고 넓은 틈에 빠져 다치기도 하겠지만,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찬찬히 길을 들여다보면 디딜 곳이 보인다는 것을 안다.
두려움에 쓰러져 울고 있던 여섯 살 아이를 잡아준 그 손의 온기는 지금도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시 한 걸음을 내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용기의 뿌리가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