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에도 마음이 있다

좋은 문장은 세상을 새로운 색으로 다시 읽게 한다

by아르망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 정진규, 「옛날 국수 가게」, 『본색』(천년의시작, 2004) -


오늘도 한 문장 앞에서

마음을 멈춘다.


국숫발을

백합꽃 꽃밭이라고 부르는 문장.


그 한마디를 읽는 순간,

평범한 흰 국수는

더 이상 국수가 아니었다.

한순간에

꽃밭이 되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좋은 문장은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같은 흰색이 하나도 없다.


흰 국수의 흰색이 있고,

메밀꽃의 흰색이 있고,

눈의 흰색이 있다.

색은 하나인데,

마음은 모두 다르다.


ChatGPT Image 2026년 8월 2일 오전 07_11_14.png


산허리는 왼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얬었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조광, 1936 -


꽃은 흰색인데,

작가는 색을 말하지 않았다.

달빛을 말했고,

숨 막히는 마음을 말했다.


그 순간

흰색은

색이 아니라

감정이 되었다.


ChatGPT Image 2026년 8월 2일 오전 07_12_47.png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유숙자 옮김,민음사, 2009 -


이 문장은

지금도 읽을 때마다 놀랍다.

눈을 보았다고 하지 않고,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고 말한다.


좋은 문장은

풍경이

어떤 마음으로 남았는지를

보여 준다.


ChatGPT Image 2026년 8월 2일 오전 07_15_14.png


예전에는

색을 그냥 색으로만 보았다.


하늘은 파랗고,

꽃은 하얗고,

노을은 붉었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문장을 사랑하게 된 뒤부터는

색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꽃은

고요가 되고,

노을은

그리움이 되고,


푸른 숲은

위로가 되고,

노란 햇살은

희망이 되었다.


색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언어였다.


그래서인지

봄이 되면

나는 하얀 풍경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팝나무가

하늘을 향해 피어 있는 길.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오후.

찔레꽃이

담장 너머로

조용히 계절을 건네는 순간.


예전에도

분명 그 자리에 있었을 풍경인데,

문장을 사랑하게 된 뒤부터는

그 하얀색들이

자꾸 말을 걸어온다.


아름다움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던 것을

새롭게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좋은 문장은

색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색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바꾼다.


그래서 오늘도

한 줄의 문장을 품고

천천히 길을 걷는다.


혹시 오늘은

어떤 색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지 궁금해서.


좋은 문장을 사랑하게 된 뒤부터

세상의 모든 색은

조금씩 마음이 되어 간다.


ChatGPT Image 2026년 8월 2일 오전 07_17_15.png






작가의 이전글아이들이 바다와 친해지는 3단계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