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먼저 피어난 것

장미는 이름으로 피지 않는다

by아르망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08, 제2막 제2장 -




장미를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그 붉은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듯,

세상의 모든 본질은 어쩌면 이름이라는 얇은 장막 뒤에서

더 또렷하게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매서운 추위를 똑바로 바라보며

봄의 발자국 소리와 걸음걸이를 맞추기 위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묵묵히 걸어온 인내의 산바카라길이다.


그래서 꽃이 겨울을 지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견디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일에 더 가깝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계절.

빛마저 차갑게 식어버린 공기 속에서

나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 있지만,

그 침묵의 깊은 안쪽에서는

천천히, 그러나 끈질긴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가지 끝에 맺힌 작은 눈 하나.

손톱보다도 작은 그 둥근 삶 속에는

터지지 않은 색들이 곱게 접혀 있고,

아직 펼쳐지지 않은 향기가

숨을 머금은 채 조용히 고여 있다.


그렇기에 봄은,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는 계절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은 것들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조용히, 그러나 거스를 수 없이.


세상을 끌어안는 그 향기로운 포옹 앞에서

나는 깨닫는다.


꽃이야말로 이 대지 위에서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그 무엇보다 강인한 생의 의지를 증명하는 존재라는 것을.


꽃이 건네는 이 경이로운 고백은

다시금 셰익스피어의 명언으로 되돌아와,

나에게 이름 너머 소중한 '어떤 것'을 바라보게 한다.


이름이란 어쩌면 우리가 본질을 가두기 위해 만든

작은 울타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이름이 불리는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견뎌온 시간과 그 시간이 빚어낸

고유한 향기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름이라는 것이 붙기 전의 향기를

가만히 떠올려 보게 된다.


장미라는 이름을 알기 전에도

그 향기는 이미 완전했을 테니까.


우리가 무엇이라 부르든,

그 존재는 이미

자기만의 방식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고,

어쩌면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여자라 부르는 꽃을 딸이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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