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늦추고 감정이 머물 자리를 만드는 시간

by정성균

연두색이었던 창밖 풍경이 어느덧 짙은 초록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한낮의 볕은 점점 깊어지고, 아침저녁의 선선한 기운은 잔잔하게 남습니다. 창밖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어린잎과 이미 몸집을 키운 잎들이 한 가지 위에서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라나는 속도는 다르지만, 서두르지 않고 한자리에 머뭅니다.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도 나무는 어느 잎 하나 밀어내지 않습니다. 흔들릴 뿐, 각자의 자리를 지켜낼 뿐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올 때 나무가 꺾이지 않는 이유는 가지 위의 모든 잎이 저마다의 무게로 흔들리며 바람을 나누어 견디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모양의 잎들이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솟아난 힘을 나누어 쓰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의 말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마음속에 있던 일을 꺼내 놓았습니다. 준비된 말이 아니었고, 정리가 잘된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고, 말끝이 흐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안에는 분명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대화는 차분하게 이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잠시 끊긴 틈을 타 다른 사람이 말을 이어받았습니다. 상대의 고백을 이해했다는 신호를 보낸 뒤 자신의 경험을 덧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화의 흐름은 매끄러웠습니다. 부딪히는 소리 없이 이야기는 더 풍성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주 익숙한 방식이었습니다.


다만 순간, 이야기의 중심축은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시작된 말은 충분히 펼쳐지지 못한 채 사라졌고, 빈자리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채워졌습니다. 말을 꺼냈던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입을 조금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습니다. 손가락으로 의자 끝을 만지다가 움직임을 거두었습니다. 시선은 바닥에 머물렀습니다. 말을 꺼내려다 머뭇거린 입술이 잠깐 떨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더 이상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장면이었습니다.


비슷한 장면은 계속되었습니다. 누군가 어려움을 꺼내 놓으면, 공감한다는 말을 내놓고 곧장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말은 매끄러웠고 논리는 단단했습니다.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감정은 점점 옅어졌습니다. 사연은 비슷한 방향으로 정리되었고, 다른 생각은 오래 남지 못했습니다. 대화는 빠르게 끝났지만, 무언가 충분히 다 말해지지 않은 느낌이 남았습니다. 사람이 더 모일수록 흐름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한 사람이 말을 꺼내면 누군가가 받아 신속하게 정리했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보태며 하나의 결론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짧은 문장으로 바뀌었고, 불편함은 개인의 성격으로, 어려움은 적응의 문제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대화는 깔끔하게 끝났지만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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