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추격자
"All station, All standby! 전 선원 정위치!"
3등 항해사의 날카로운 방송이 정박 중이던 장보고호의 고요를 갈랐다. 화물 선적을 마친 8,000 TEU급의 거구는 웅장한 엔진 소리와 함께 거친 물거품을 일으키며 부두를 밀어냈다. 육중한 강철 몸체가 인도양을 향해 서서히 머리를 돌리는 순간, 우리는 몰랐다. 세인트폴 언덕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두 명의 약탈자'가 이미 사냥을 시작했다는 것을.
불과 몇 시간 전, 말라카 해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세인트폴 언덕 폐허에는 포르투갈 혼혈인 A 씨와 검은 안대의 해적 두목 K 씨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350마력 엔진 두 대를 단 '괴물 어선'을 타고 우리의 뒤를 쫓고 있었다. 컨테이너를 가득 실어 흘수선이 낮아진 장보고호는 그들에게 가장 탐스러운 먹잇감이었다.
브리지(Bridge)의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선장은 말없이 망원경을 고쳐 쥐며 전방의 암흑을 주시했다. 뜨거운 열대의 태양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이제 바다는 등화관제가 엄격히 적용되는 야간 항해 구역으로 변했다.
실내의 작은 불빛조차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차단된 선내. 오직 선수와 선미, 좌우현, 그리고 마스트 상부의 항해등(Navigation light)만이 약속된 규칙에 따라 깜빡이며 고독한 항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레이더 화면을 응시하던 선장의 눈매가 날카롭게 떨렸다.
"불빛이 없는데... 레이더에 점 하나가 잡힌다. 우리 쪽으로 바짝 붙고 있어!"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 오직 전자기파만이 감지해낸 의문의 물체. 등화관제를 하며 접근한다는 것은 사냥감을 노리는 해적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선장의 손이 즉시 ECR(Engine Control Room) 전용 전화기를 낚아챘다.
"ECR! RPM 최대한 올려! 전속력 투입!"
순간, 선체 깊숙한 곳에서 1만 마력의 투 사이클 디젤 기관이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평소와는 달랐다.
"해적 출몰 의심 경계경보!"
날카로운 비상벨이 선내를 뒤흔들었다. 기관 당직자를 제외한 모든 선원이 최후의 보루인 시타델(Citadel, 대피실)로 몸을 숨겼다. 외부로 통하는 모든 수밀문(Water tight door)이 굳게 잠겼다.
갑판 위에서는 고압 해수를 뿜어내는 물대포가 해적의 접현을 막기 위해 총구처럼 바다를 겨누었다. 선장의 손은 이미 국제 해상 구조 요청 장치(SSAS) 스위치 위에 머물러 있었다. 언덕 위에서 사냥을 모의했던 K 씨 일행의 괴물 어선이 장보고호가 만들어낸 거친 와류를 뚫고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숨 막히는 추격전은 무려 4시간 동안 이어졌다. 레이더를 주시하던 항해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유령 같던 레이더의 점이 서서히 멀어지더니 사라졌다. 좁고 위험한 말라카 해협을 전속력으로 빠져나온 장보고호의 승리였다
"상황 종료. 경계경보 해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00시부터 04시까지의 미드워치를 담당하는 당직자들을 남기고 선원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3등 기관사인 나 역시 긴장이 풀린 몸을 이끌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다 바카라상 위에 놓인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하얀 백사장,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나의 첫사랑 왕링링. 방금 전까지 죽음의 공포가 감돌던 사선(死線) 위였지만,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바다의 냉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거친 파도와 해적의 위협 속에서도 외항선원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 그것은 육지에 두고 온 소중한 추억과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