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바다와 여인

해창다리에서 맺은 인연

by최경열

내 유년의 기억은 언제나 짠 내 나는 바다 향기로 시작된다. 변산면 대항리, 그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요람이자 끝없는 동경의 시작점이었다. 외가 역시 바다를 지척에 둔 같은 마을 큰 대항리였다, 용하다고 소문난 외할머니께서는 어린 내 손을 잡고 늘 엄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Gemini_Generated_Image_wwp7qpwwp7qpwwp7.png대항리 옛 모습 <AI 이미지 생성>

“갱열아, 너는 물가를 조심해야 쓰겄다. 서쪽으로는 발도 붙이지 마라.”

할머니의 신통방통한 점괘였지만, 바다는 금기일수록 더 붉게 타오르는 첫사랑 같았다. 나는 할머니 몰래 바닷가에 서서 채석강 너머로 지는 낙조를 바라보곤 했다. 위도를 등지고 수평선 아래로 침잠하는 태양은 세상을 온통 주홍빛 물감으로 적셨다. ‘저 너머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그 막연한 그리움이 결국 나를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마도로스로 만들었으니, 할머니의 점괘는 맞으면서도 틀린 셈이었다.

중학교까지는 고향 산천을 누볐지만, 고등학교는 큰맘 먹고 부안 읍내로 진학했다. 일종의 ‘유학’이었다. 친구들 대부분이 근처 실업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나는 고집을 부려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 넘게 달리는 완행버스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쟁터’였다.

Gemini_Generated_Image_n0qlwbn0qlwbn0ql.png시골버스 안전여객

안전여객과 전북여객, 두 대의 버스가 유일한 발이었다. 읍내를 출발해 동진, 행안, 하서를 거쳐 해창다리를 건너 변산에 닿을 때면 온몸이 파김치가 됐다. 버스를 한 대 놓치면 터미널 길바닥에서 한 시간을 속절없이 보내야 했기에, 우리는 체면 불고하고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으로 몸을 던졌다. 남녀 학생 할 것 없이 빽빽하게 끼어 숨을 헐떡이다가, 하서면을 지나 해창다리쯤 건널 때야 비로소 자리가 나고 숨통이 트이곤 했다.

해창다리에는 서글프고도 섬뜩한 전설이 서려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다리 기둥에 콘크리트를 부을 때 근처 군막동에 살던 처녀가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공사 기간과 비용 때문에 산 사람을 그대로 매립했다는 확인 안 될 소문은, 안개 자욱한 날이면 다리 밑에서 ‘쿵, 쿵’ 하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괴담으로 변해 떠돌았다. 그 원한 서린 다리 아래로, 운명처럼 내 인생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45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백련리와 비득치를 지나 막 해창다리에 진입했을 때, 갑자기 비명 같은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버스가 멈춰 섰다.

해창다리.png해창다리 와 소녀들

“오메, 저그 좀 보드라고! 애덜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네!”

시골 버스 기사 아저씨의 다급한 외침에 사람들 시선이 창밖으로 쏠렸다. 다리 밑, 조개를 캐던 앳된 소녀 셋이 물속에서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이 빠지자 구하려던 친구들이 연달아 휩쓸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지켜보던 어른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워매, 우짜쓰까이! 저그 물살이 센 디... 사람 잡겄네, 사람 잡겄어!” “누가 좀 들어가 봐! 아그들 죽겄네!”

‘물귀신이 잡아간다’는 옛말에 겁을 먹은 탓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달랐다. 할머니의 점괘를 비웃듯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놈이었다. 수영도 개해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별명이 변산 물개였다. 물속에서 2분 정도는 숨 안 쉬고 잠수도 하였다. 망설임 없이 교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차가운 물속으로 몸을 날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생각보다 얕았고, 나는 물개처럼 파고들어 허우적대는 소녀 셋을 차례로 모래사장 위로 끌어올렸다.

두 명은 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지만, 한 명은 미동도 없었다. 하얀 모래 위에 눕혀진 소녀는 물을 너무 많이 마셔 배가 개구리처럼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학생! 가만 있지 말고 주딩이 벌려 바람이라도 집어 넣야지! 우물쭈물하다 아그덜 잡겄어!”

나는 용기를 내어 입술을 맞추고 숨을 불어넣었다. 귀엽게 삐져나온 옥니가 입술 끝에 닿았다. 묘한 기분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순간, 소녀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헉- 하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메, 살았다! 살았어! 학생이 큰일 했네잉!”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교련 시간에 건성으로 배웠던 인공호흡(심폐소생술) 동작들을 필사적으로 끄집어냈던 것이다. 우선 아래턱을 쥐고 옆으로 눕혀 입을 벌렸다. 그러자 폭포수 같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을 뱉어낸 소녀를 다시 바르게 눕혔다. 젖어버린 하얀 블라우스 너머로 수줍은 소녀의 살결이 비쳤고, 그 떨림이 내 손끝까지 전해졌다. 시골 아이답지 않게 유난히 피부가 하얬다.

안도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정신이 든 소녀는 창피한 듯 가슴팍을 여미더니, 몽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눈 맞춤. 소녀는 곧 수줍게 시선을 피했다. 기운이 없는 소녀를 업어 해창마을 어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하얀 피부와 귀여운 옥니를 가졌던 열다섯 살의 소녀. 그것이 내 아내와의 첫 만남이었다. 비포장도로의 먼지 속으로 사라지던 그날의 해창다리는, 그렇게 내 평생의 항로를 결정지은 운명의 부두가 되었다. 논픽션 소설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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