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뜨거웠던 1981년의 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2000년대도 중반을 훌쩍 넘어섰다. 군산에 배를 만들러 내려왔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 병호를 만났다. 세월의 주름이 얹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쇠주 한잔을 기울이는데, 병호가 툭 하고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 하나를 꺼내놓았다. 바로 우리가 젊은 날 함께 맞았던 ‘벼락’ 이야기였다. 그 시절 이후로 줄곧 군산을 지켜온 병호였기에 그날의 날짜와 공기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함께했던 친구는 모두 네 명. 흐릿해진 기억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술자리에서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우룡이, 병호, 나(갱열),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소문 끝에 목소리를 들은 양수까지. 그렇게 45년 해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날의 주인공 네 명이 온전히 한자리에 모였다.
때는 1981년 9월 1일. 우리가 날짜를 이토록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그날은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으로 지정된 임시 공휴일이었다. 세상은 10·26 사태부터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전국에 내려진 계엄령까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폭풍 속에 있었다.
군산에 남아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과 직업 기술을 배우던 우리에게도 그 폭풍은 고스란히 밀려왔다. 대학은 임시 휴교령이 내려져 출석부조차 돌지 않았다. 갈 곳 없는 청춘들은 역전으로, 공원으로, 부두로 떼를 지어 모여들었다. 머리를 맞대고 데모를 계획하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 신형택이는 당시 군산대 과대표로 전단지를 뿌리며 데모를 주동하다 수배령이 떨어졌었다. 나 역시 맨 앞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다가 경찰서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사흘간 차가운 철창 속에 갇혀 있다가, 두 번 다시 데모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광주에서 수많은 학생이 죽어가고, 차마 입에 담기조차 무시무시한 군인들의 만행이 소문으로 퍼지던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형택이는 그 후 여섯 달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갑자기 나타났지만, 그간의 일은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까칠하게 상해버린 친구의 얼굴을 보며 우리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엄혹한 시절에도 청춘의 낭만은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짊어진 채, 귀신처럼 머리를 나부끼며 거리를 걷는 것이 우리에겐 최상의 멋이었다. 핸드폰은 상상도 못 했고 집에 전화 한 대 놓는 것도 귀한 시절이라 연락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토요일이나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군산 역전이나 단골 대포집에서 만나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딱딱 연락이 닿았는지 미스터리다. 돈이 없던 우리는 500원짜리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키면 안주가 열댓 가지씩 깔리던 선술집을 아지트 삼아 젊은 날의 에너지를 발산했다. 맥주를 마시는 것은 아주 특별한 날에나 누릴 수 있는 사치였기에, 우리의 청춘은 늘 시큼하고 걸쭉한 막걸리 냄새와 함께였다.
그해 9월 1일 밤도 그랬다. 나와 병호, 우룡이, 양수 넷은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나 우룡이의 자취방에서 거나하게 막걸리를 들이켰다. 얼근하게 취기가 오르자 나는 사촌 형이 군대에 가면서 집에 두고 간 통기타를 둘러메고 친구들과 함께 월명공원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독학으로 메고 다니던 기타였다. 그 시절엔 학원도 없었고 돈도 없어서 서점에서 대충 기타 교본 한 권을 사다가 코드 몇 개 짚고 박자나 맞추는 수준이었지만, 기타를 어깨에 메는 순간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대단한 음악가가 된 기분이었다. 잘 치지도 못하면서 온갖 폼은 다 잡고 다녔는데, 모르는 이들은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대학가요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이라, 기타는 내 분신이자 흥을 돋우는 최고의 무기였다.
월명공원 정상에 올라 기타를 드럼처럼 두드리며 쿵쿵짝짝 고고 박자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종용의 ‘너’, 대학가요제 수상곡인 산울림의 ‘나 어떡해’가 공원에 울려 퍼졌다. 발을 삼각형으로 교대로 움직이며 가슴을 내밀었다 움츠리는 고고춤은 그 시절 젊은이라면 못 추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가끔 술이 거나해지면 옛 생각에 그 스텝을 밟아보곤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우러져 놀고 있는데, 밤하늘이 무섭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멀리서 벼락 치는 소리와 번갯불이 번득였다. 곧 쏟아질 모양새였지만 취기와 흥에 취한 우리는 정신없이 노래를 이어갔다. 자정쯤 되었을까, 마침내 장대 같은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뛰어간 곳은 월명공원 정상의 수시탑 밑이었다. 다행히 탑이 지붕 역할을 해주었다. 조금 있으니 어디선가 젊은 여자 둘과 남자 셋도 비를 피해 수시탑 밑으로 뛰어들어왔다. 빗줄기는 그칠 기미 없이 점점 더 굵어졌다.
탑 밑에서 내려다보는 군산 시내의 야경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어릴 적 시골 원두막이나 논밭에서 소나기를 만나 옥수수 더미 밑으로 숨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며 가슴 한구석이 몽글해졌다. 나는 기타를 고쳐 잡고 슬로우 록 박자로 천천히 줄을 튕기며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빗속을 걸어갈~까요~ 둘이서~ 말~없이~ 갈까요~~~”
김정호의 ‘빗속을 둘이서’였다. 탑 밑에 모인 사람들이 한 사람씩 박수를 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다 함께 목소리를 모아 떼창을 했다. 사방을 울리는 천둥소리와 억수 같은 빗소리 덕에 거친 기타 반주와 서툰 노래 실력은 문제 되지 않았다. 청춘들의 화음이 빗속으로 아름답게 녹아드는 듯했다.
그러나 낭만은 찰나였다. “우르릉 쾅쾅!” 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번개가 바로 우리 머리 위로 내리 꽂혔다. 0.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온몸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수시탑 밑은 사방이 뚫려 있어 바람을 타고 거센 빗물이 들이쳤고, 바닥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물이 고여 있었다. 수시탑 상부의 피뢰침에 떨어진 수만 볼트의 고압 전류가 빗물을 타고 축축하게 젖은 우리 몸으로 그대로 흘러든 것이다. 강력한 전기 감전과 고압의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몇 분이 지났을까, 간신히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 또 한 번의 번개가 대지를 강타했다.
공포와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정신이 먼저 돌아온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을 뚫고 시내를 향해 달렸다. 마치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아 간신히 살아남은 폐잔병처럼, 우리는 힘없이 흐느끼며 공원을 내려왔다.
중간쯤 내려왔을 때 문을 닫은 간이 매점이 보였다. 처마 밑으로 기어들어가 겨우 비를 피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면서 천둥 번개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두고 온 친구들이 걱정됐고, 무엇보다 내 전 재산 1호였던 통기타를 두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가로등도 희미하고 인기척 하나 없는 으스스한 빗속의 공원. 방금 벼락이 떨어진 그 무시무시한 현장으로 다시 올라간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지만,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발을 뗐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다시 올라간 수시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폭격 맞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내 소중한 기타는 도망치던 누군가에게 밟혔는지 목이 처참하게 부러져 있었고, 주인 잃은 신발과 가방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먼저 올라온 병호가 있었다. 병호 역시 무서워서 먼저 도망쳤었지만, 친구들이 걱정되어 의리로 다시 올라온 것이었다. 사실 나는 친구 걱정 반, 기타 걱정 반으로 올라왔던 터라 그 와중에도 부러진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속상해했다. 그 모습을 본 병호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기타가 뭐가 중요하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내 분신 같은 기타를 산 밑으로 던져버렸다. 그 순간에는 병호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상황이 정말 심각했다.
탑 밑에는 비를 피해 같이 노래를 부르던 젊은 여자 두 명이 돌멩이에 맞은 개구리처럼 까무러쳐 누워 있었다. 병호는 당황해하면서도 여자의 숨소리를 듣고 심장을 만져보며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변산해수욕장에서 안전요원 교육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했던 병호는 순발력이 있었다. 고압 전류 때문에 심장마비가 온 것이라 진단한 병호는 즉시 여자의 입을 벌려 인공호흡을 하고 가슴 압박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얼른 다른 여자에게 똑같이 하라고 소리쳤다.
교련 시간에 인공호흡을 건성으로 배웠던 나는 이런 실전 상황에서 손이 덜덜 떨렸다. 병호는 피가 멈춰 굳어가는 몸을 깨워야 한다며 전신 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숨 가쁜 상황 속에서 조여오는 벨트를 풀고 청바지 지퍼를 반쯤 내리자 핑크색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엉큼한 생각을 할 겨늘도 없이, 오직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거칠게 온몸을 주무르고 숨을 불어넣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속적인 인공호흡과 마사지 덕에 차갑고 딱딱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가냘픈 신음과 함께 의식이 돌아왔다. 두 소중한 생명을 극적으로 구해낸 순간이었다. 만약 구조 지식이 있던 병호가 없었다면 그 여인들은 꼼짝없이 차디찬 탑 밑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의식은 겨우 찾았지만, 늦여름 밤비에 젖은 여인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반시체나 다름없는 그녀들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시내로 업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업으려고 보니 한 여자는 동창 혜림처럼 날씬하고 예쁜 몸매(약 50kg)였고, 다른 한 여자는 순용이처럼 체구가 당당한 글래머 몸매(약 70kg)였다. 기운이 다 빠진 병호가 얼른 날씬한 혜림이를 강제로 선점해 들쳐업었고, 나에게 남겨진 것은 거구의 순용이였다. 평소라면 쌀 80kg도 거뜬히 메던 나였지만, 방금 벼락을 맞은 후유증으로 다리가 후들거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병호가 먼저 내가 순용이를 업을 수 있도록 도와준 뒤, 가벼운 혜림이를 가뿐히 업고 빗속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순용이를 업고 20미터도 못 가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주저앉아야 했다. 저만치 앞서가던 병호는 혜림이를 언덕 위에 안전하게 내려놓고 다시 뛰어와 나를 도와주었다.
한참을 내려오다 너무 힘이 부쳐 결국 파트너를 바꾸기로 했다. 내가 혜림이를 받아 업었는데, 몸무게는 얼마 차이 안 나는 것 같아도 내게는 날아갈 듯이 가볍게 느껴졌다. 빗물에 젖은 얇은 블라우스 너머로 뭉클한 앞가슴이 내 등과 어깨에 완전히 밀착되었고, 통통한 엉덩이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다. 조금 전까지 추위로 새파랗게 떨던 온몸에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확 솟구치며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청춘의 본능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영광여고 정문 앞까지 내려왔을 때, 저 멀리서 경찰들과 아까 먼저 도망쳤던 젊은 남자 두 명이 보였다. 그들이 파출소에 신고해 우리를 찾으러 공원을 뒤지던 참이었다. 그들은 의식이 희미한 순용이와 혜이의 이름을 부르며 깨웠다. 부르는 모양새를 보니 친구거나 연인 사이인 듯했다.
우리가 벼락 맞은 여인들을 구출해 업고 내려온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지만, 정작 그들의 시선은 딴 곳에 머물렀다. 빗물에 젖어 살결이 비치는 옷차림에, 인공호흡과 마사지를 하느라 바지 지퍼가 반쯤 풀어져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본 남정네들과 경찰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고맙다는 말은커녕, 혹시 비 오는 틈을 타 몹쓸 짓을 한 건 아닌가 의심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결국 파출소까지 끌려가 신원조회를 당하고 연락처를 남긴 후에야 씁쓸하게 풀려날 수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으로 의심만 잔뜩 받으니 억울하고 기분이 아주 잡쳤다. 사람 생명을 구했다는 보람은 온데간데없이 허탈함만 남은 밤이었다.
파출소를 나와 터덜터덜 소방서 앞 굴다리를 건너려는데, 웬 익숙한 실루엣이 소방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우룡이였다. 벼락을 맞고 먼저 뛰어 내려왔던 우룡이는 친구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소방서에 신고하러 갔던 모양인데, 당직 서던 소방관은 "왠 벼락이냐"며 콧방귀만 뀌고 들은 척도 안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양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공원 풀숲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건 아닐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소방서에 다시 찾아가 애원했지만, 당직자는 귀찮다는 듯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렇게 연락할 방법도 없이 애만 태우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학교에서 양수를 만날 수 있었다. 양수 놈은 벼락을 맞자마자 혼수상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자취방까지 단숨에 뛰어 도망쳤다고 했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그 고생과 걱정을 안 했을 텐데, 아날로그 시절이 남긴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소주잔을 비우며 3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끝맺은 병호와 나는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지금 생각해도 목숨을 건졌으니 천운이었고, 누군가의 생명을 살렸으니 값진 청춘의 한 페이지였다. 술자리를 마치고 일어서며 나는 병호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건넄다.
“야 병호야, 지금이라도 월명공원 정상 수시탑에 경고판 하나 붙여야 쓰겄다. ‘낙뢰 주의! 비 오는 날 절대 접근 금지!’ 라고 말여. 우리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면 안 되잖냐?”
서글펐고, 뜨거웠고, 야단법석이었던 1981년의 그해 가을 밤. 부러진 통기타와 함께 수시탑에 묻어두고 온 우리의 청춘이, 문득 군산 앞바다의 짠 내를 타고 아련하게 밀려오는 밤이었다.
울산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40년 만에 다시 찾은 군산. 이곳에 앵커를 내리고 노후를 준비하기로 했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탁구, 그곳에서 우연히 한 여성분을 보게 되었다. 부부와 함께 탁구를 즐기던 그녀는 야간반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고, 나 역시 야간반에서 탁구를 치며 자연스럽게 그녀와 친해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탁구 실력은 그녀가 나보다 월등히 앞섰고, 어느 날 수시탑 벚꽃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40년 전 수시탑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40년 전 수시탑에서 벼락을 맞은 경험을 물었고, 그녀 역시 같은 경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쓰러져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소방서였다고. 맞다. 그녀가 바로 40년 전 내가 업고 온 혜림씨였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의 가정과 아이들을 모두 키워내고 안정을 찾았지만, 벼락 맞은 여성을 탁구장에서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다. 40년 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그녀와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제는 군산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며 노후를 더욱 풍요롭게 채워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