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영하 6도의 하얼빈

얼어붙은 한글을 녹이다

by최경열

1995년 3월의 남통은 유채꽃이 막 꽃망울을 터트리며 대지에 노란 물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3시간을 날아 도착한 하얼빈 공항의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스팔트 위로 흩날리는 눈발과 살을 에듯 파고드는 칼바람. 영하 6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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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봄점퍼 차림이었던 나는 대륙의 거대한 스케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쪽의 봄과 북쪽의 동장군이 공존하는 땅. 서둘러 두꺼운 외투를 하나 사 입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인민복 속의 진주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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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비에 앉아 약속한 김병철 교수님을 기다렸다. '명문대 교수'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나는 멀끔한 정장 차림의 신사를 상상하며 입구를 주시했다. 그때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주차장 구석에 멈추더니, 허름한 인민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내렸다. 시골뜨기 경비원이나 청소부겠거니 생각하며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그 남자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에서 오신 최경열 선생님 아니십니까?"

그가 건넨 명함에는 분명히 '하얼빈 공정대학 교수 김병철'이라 적혀 있었다. 외모만으로 대륙의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면접 장소인 회의실로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00여 명의 청년들. 하지만 그들의 행색은 처참했다. 며칠은 감지 않은 듯 기름기가 흐르는 머리칼, 때 묻은 두툼한 인민복들. 당시 하얼빈의 조선족들은 개혁개방의 훈풍 속에서도 여전히 척박한 삶을 견뎌내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조선족 슬롯는 한국행 열풍인 '코리안 드림'과 대도시 진출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경제적 빈곤을 동시에 겪던 시기였다.


A4 용지 두 장, 눈물의 시험지

100명 중 30명을 뽑아야 했다. 나는 복잡한 전공 시험 대신 A4 용지 두 장을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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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십시오. 대상은 누구든 좋습니다. 한 장은 한글로, 한 장은 중국어로 번역하십시오."

언어 능력과 인성을 동시에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서걱거리는 펜 소리만이 회의실을 채웠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한 청년이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다가가 사연을 물었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십니다. 편지를 써야 하는데... 저는 중국 학교를 나와서 중국말은 잘해도 한글을 쓸 줄 모릅니다. 마음은 가득한데 글자로 옮기질 못해 너무 죄송해서 눈물이 납니다."

그는 중국어로는 장문의 편지를 써 내려갔지만, 한글 시험지는 하얀 백지였다. 90년대 하얼빈의 조선족 가정은 자녀를 한족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주류 슬롯에 편입시키기 위한 고육지바카라이었으나, 그 결과로 제 나라말을 잃어버린 '글 못 읽는 조선족' 세대가 탄생한 아픈 단면이었다. 나는 그를 1차 합격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글은 가르치면 되지만, 부모를 향한 그 뜨거운 심성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이기에.


항미원조와 안중근, 뒤섞인 역사관

다음 날 이어진 최종 면접. 나는 그들에게 한국 노래를 불러보게 하고, 역사관을 물었다.

"안중근 의사나 세종대왕, 그리고 6.25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치른 성지다. 그들에게 안중근은 일제강점기의 영웅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거대한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6.25 전쟁에 대한 답은 충격적이었다.

"6.25요? 그게 뭡니까? 저희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배웠습니다. 미제국주의에 맞서 북조선을 도운 정의로운 전쟁이지요."

아하, 그랬다. 그들은 피는 우리와 같을지언정, 머리와 가슴은 중국의 교육을 받은 '중국인'이었다. 나는 비로소 조선족을 대할 때의 내 시각을 바꿔야 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돌아온 형제'이기 이전에,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은 '현지인'들이었다.


송화강에 띄우는 희망

최종 30명을 채용했다. 월급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3,000위안(약 30만 원). 하얼빈 일반 노동자 임금의 몇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남통까지는 기차와 버스로 2박 3일이 걸리는 먼 길이었지만, 청년들의 눈동자에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이글거렸다.

면접을 마치고 호텔 근처 송화강(쑹화강) 가에 섰다. 3월 초임에도 강물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한겨울이면 강 너머 러시아 땅까지 말 구루마를 타고 건넜다는 이 거대한 물줄기. 해빙기라 위험해 강을 건널 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얼음 조각 예술품들이 하얼빈의 혹독했던 겨울을 증명하고 있었다.

"중국은 정말 넓구나. 그리고 이 넓은 땅에서 우리 인재들을 찾아냈구나."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다시 프로펠러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남통 조선소에는 하얼빈의 기백을 가진 30명의 구원투수가 합류할 것이다. 15년 전 링링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회한을, 나는 이 청년들의 미래를 열어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남통의 따뜻한 유채꽃 향기가 그리워졌다. 나의 수리 조선소, 그 강철의 성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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