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8
우리가 32강 진출을 위한 경우의 수를
계산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뛰는
손흥민과 이강인이 있었고,
김민재와 이재성이 있었다.
역대 최강의 대표팀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32강 진출을 걱정하며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체코를 이기자 성급한 친구들은 벌써
16강에서 어느 나라를 만나게 될지 상상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곳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남아공전이 끝난 뒤
우리는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다른 조에서 어느 팀이 몇 골 차로 이겨야 하는지,
어느 팀이 비기고 어느 팀이 져야 하는지,
우리가 조 3위로도 32강에 진출할 가능성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따지기 시작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12개 조의 3위 팀 가운데
상위 8개 팀이 32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경우의 수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남아공에 졌을 때만 해도
한 통계업체는 우리의 32강 진출 가능성을
87퍼센트가 넘는 것으로 계산했다.
우리는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다른 나라의 경기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경기가 계속될수록
경우의 수는 하나씩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월드컵도 끝났다.
한국은 48개 참가국 가운데
34위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날 붉은 악마인 친구가
도저히 못 참겠다며 찾아왔다.
노가리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생맥주 500 한 잔을 비운 친구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축구를 잘 모르는 나는
그가 설명하는 말의 절반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그날 친구가 꺼낸 것은
전술 이야기가 아니었다.
음모론이었다.
친구는 감독이 일부러
조 3위를 선택하려 했다고 말했다.
조 2위가 되면
캐나다와 만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캐나다는 우리보다 FIFA 랭킹이 낮았다.
이기면 당연한 결과가 되고,
지면 감독의 바카라임이 더 커지는 상대였다.
더구나 캐나다의 제시 마치 감독은
과거 한국 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던 사람이다.
그런 감독에게 진다면
감독 선임 과정까지 다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아예 캐나다를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노가리를 외면한 채
생맥주만 얼른얼른 들이키며
계속 말했다.
“캐나다에 지면 감독이 진 것이지만,
다른 조 1위로 올라온 강팀에게 지면
한국 축구가 진 것이 되잖아.”
“그러니 차라리 조 3위로 올라가서
강팀을 만나는 편이 안전하지.”
“강팀을 이기면 감독의 용병술 덕분이고,
지면 선수들 능력의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잘 싸웠다고 말할 수 있고.”
친구의 말대로라면
참으로 완벽한 경우의 수였다.
그는 남아공전의 소극적인 경기 운영도
증거라고 했다.
특히 동점골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공격에 가담하려던 김민재 선수가
갑자기 교체된 장면을 문제 삼았다.
“저건 부상당한 선수의 표정이 아니야.
동점골을 넣고 싶어 하는데 빼 버리니 화가 난 거지.”
나는 친구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민재 선수는 오른쪽 종아리에 이상을 느껴
자신이 직접 교체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교체 과정에서 보인 제스처도
감독을 향한 항의가 아니라
벌어진 수비 간격에 대한 아쉬움이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 설명을 믿는다.
그런데 친구는 믿지 않았다.
“지금 와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 편이 서늘해졌다.
친구의 음모론이 그럴듯해서가 아니었다.
공식적인 설명조차
그가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의 친구는 원래 음모론자가 아니다.
근거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누군가를 무조건 의심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그저 평생 축구를 좋아했을 뿐이다.
대표팀이 이기면
한 달이 즐거워지는 평범한 축구팬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감독의 모든 판단에서 숨은 의도를 찾아낸다.
감독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조직이 신뢰를 잃으면
사람들은 리더의 능력만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의도까지 의심한다.
신뢰가 남아 있을 때는
실수가 실수로 보인다.
잘못된 판단도 판단 착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신뢰가 사라지면
실수는 의도가 되고,
판단 착오는 계산된 행동으로 해석된다.
리더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은 설명을 믿지 않는다.
그 말 뒤에 숨은 목적부터 찾는다.
이 지경에 이르면
진실이 무엇인지 보다는
음모론을 더 그럴듯하게 받아들이는 사실 자체가
이미 조직의 실패이다.
한국 축구는 월드컵 이전부터
신뢰를 잃고 있었다.
감독 선임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한 팬들의 불만에 그치지 않았다.
문체부 감사에서도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선임 절차가 지적되었다.
그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의혹들이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월드컵이 끝난 뒤
감독은 성적 부진의 바카라임을 지고 물러났다.
축구협회장도 물러났다.
그러나 사람이 떠났다고
그들을 지탱하던 방식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떠나도
그를 선임했던 구조는 남는다.
회장이 떠나도
한 사람이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체계는 남아 있을 수 있다.
신뢰는 누군가의 사퇴만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히고,
왜 그런 결정이 이루어졌는지 설명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의사결정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나의 붉은 악마 친구는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의 추측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물론 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날 내게 더 중요하게 다가온 질문은
따로 있었다.
평생 한국 축구를 사랑했던 사람이
왜 공식적인 설명보다
음모론을 더 믿게 되었을까.
나는 친구의 말이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이미 많은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길게 보면 이번에 32강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한국 축구의 썩은 뿌리를 베어낼 힘과 명분을 얻었잖아. 이번에는 정말 싹 바꾸면 돼.”
조금 전까지 분노로 가득하던 친구의 목소리에
어느새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새 그 친구는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설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신뢰를 얻어
대표팀을 아무 의심 없이 응원하며 행복해하던
예전의 내 친구를 되찾을 가능성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