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감나무
아파트 뜰에는 수목원 못지않게 여러 종의 오래된 나무가 많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잎들이 바람과 햇볕으로 매일 조금씩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낸다. 그중 유독 붉게 물든 감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 봄, 다른 나무들이 다투어 싹을 틔울 때도 죽은 듯이 있다가 천천히 잎눈을 밀어내던 나무다.
내 고향 양산에는 유난히 감나무가 많았다. 집집이 커다란 감나무 두세 그루는 기본이고 전답(田畓) 가에도 몇 그루씩 있었다. 그 시절엔 따로 가꾸지 않아도 감은 잘 열리고 가을이면 꽤 많이 따서 농한기의 소득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침 일찍 눈을 비비면서 양은 도시락을 들고 개울을 건너 비탈길을 타고 오르면 돌감나무 여러 그루가 야산 끝자락에 고목으로 서 있었다. 그 아래 참감 꽃보다 작은 돌감 꽃이 밤새 떨어져 비탈진 언덕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감꽃처럼 하얗게 웃으며 도시락 가득 꽃을 담았다. 감꽃 한주먹 입안에 넣고 떫은 꽃 맛에서 단물이 날 때까지 씹어 먹기도 했다. 돌감은 다 익어도 너무 떫어 먹을 수 없었지만, 감꽃은 돌감 꽃이 제일 맛있었다. 때론 소꿉놀이 하면서 실에 꿰어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기도 하고 밥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감꽃이 진 자리에 엄지만 한 열매가 생겼고 햇살은 뜨거워졌다. 모내기한 논에는 모들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논물도 햇볕을 받아 따뜻해졌다. 어느덧 감나무에는 아기 주먹보다 작은 풋감들이 댕실댕실 달렸다. 우리는 감나무에 기어오르거나 가지를 휘어잡고 단단하게 여물고 있는 땡감을 따서 논바닥 깊숙이 찔러 넣어 두었다. 며칠 후에 떫은맛이 가신 감을 찾아서 한입씩 베어 물었다. 단맛이 나면 나누어 먹고 떫으면 다시 논바닥에 속에 감추어 두었다.
계절은 언제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푸르뎅뎅하고 단단하던 땡감들이 곱게 물든 나뭇잎보다 더 빨갛게 변했다. 나무에서 지레 익어서 꿀물같이 다디단 홍시가 툭툭 떨어지면, 지난봄처럼 감나무 아래로 간다. 양은 도시락 대신 싸리 바구니를 들고 홍시를 줍기 위해서…
바구니 가득 담긴 감은 팔아서 용돈도 벌고 터진 홍시는 손가락에 묻혀가면서 맛있게 먹었다.
“오늘은 감을 따야겠다.”
가을이 깊숙이 익어갈 무렵 아버지는 짚으로 엮은 망태기를 바지게에 담아서 지게 위에 올리고 전짓대를 들고 집을 나섰다. 엄마는 자잘한 도구들을 챙겨서 아버지 뒤를 따르고 나도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갔다.
아버지는 감나무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감을 땄다. 전 짓대 끝에 여린 가지를 끼우고 살짝 돌리면 ‘똑딱’하면서 가지가 부러지고 장대 끝에는 빨간 감이 대롱대롱 달렸다. 감이 가득 찬 망태기를 아래로 내려 주면 엄마는 감꼭지를 다듬고 나는 상처 난 감을 골라냈다.
감나무가 있던 밭은 신작로 옆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 감 따 능 교?”
“여기 와서 홍시 하나 묵고 가소.”
엄마는 옆으로 골라두었던 잘 익은 홍시 두 어 개를 지나가던 낯선 이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그 사람과 세상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기도 하셨다. 아버지도 나무 위에서 이야기 속을 넘나들며 감을 따고 감나무 아래는 그렇게 길손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갈 때쯤 아버지 바지게에는 붉은 감이 가득 담겼다.
“아부지, 저기 감이 달려 있는데요. 한 개, 두 개, 세 개…….”
“ 응. 그건 까치밥이다.”
아버지는 감이 담긴 지게를 지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가을을 끝내고 감을 따며 겨울준비를 했다.
상처 난 감은 감 쪼가리(감 말랭이)를 만들고 제사에 올릴 곶감 몇 줄을 깎고 나선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둔다. 겨우내 그 감들을 아랫목에서 익혀 큰 시장(부산)으로 내다 파셨다. 차가 없던 시골이라 함지에 담아서 이고 지고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이 십리 길을 걸어가서 부산 가는 기차를 탔었다.
집 뒤란에 양쪽으로 버티고 있던 감나무들은 집을 넓히느라 예전에 잘려나갔고 들에 있는 감나무는 굳건히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이제는 감 딸 사람이 없어 나무에서 얼어버리거나 까치밥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고향 감나무도 함께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