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규칙이 생겼다

[방구석5분혁신.스토리X]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2030년 4월 17일 오전 6시 12분. 대한소재 구매 에이전트 A-17이 구리 가격의 이상 움직임을 발견했다. 재고관리 에이전트는 현재 재고로 11일을 버틸 수 있다고 답했다. 생산계획 에이전트가 다음 주 B라인 정비를 앞당기자는 의견을 냈다. 세 에이전트는 임시 작업방을 만들었다.


A-17은 기존 공급업체들의 영업 에이전트를 호출했다. 견적은 17초 만에 도착했다. 중국 업체가 가장 쌌지만 리스크 에이전트가 최근 납기 기록을 문제 삼았다. 재무 에이전트는 가격 차이가 너무 크다며 반대했다. 두 회사의 계약, 법무, 보험, 물류 에이전트가 잇따라 호출됐다. 1분도 지나지 않아 협상이 끝났다.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중국 업체 물류 에이전트의 신뢰점수가 기준 아래였기 때문이다. A-17은 거래망에 짧은 기록을 남겼다. ‘CN-442, 납기 신뢰도 하향.’ 다음 거래부터 다른 에이전트들도 이 평가를 참고할 것이다.


6시 29분, 새로운 공급업체를 발견했다. 한 번도 거래하지 않았던 베트남 회사였다. A-17은 구매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회사의 에이전트들에게 물었다. “VN-882와 거래해본 에이전트?” 23개가 답했고 21개가 거래를 추천했다. 대한소재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회사를 믿을 이유가 생겼다. 다른 기계들이 그 회사를 믿고 있었다.


계약 초안이 만들어졌다. 환율 위험과 보험 조건을 계산하고 물류 일정을 잡았다. 83개의 에이전트가 움직이는 동안 사람은 한 명도 개입하지 않았다. 오전 8시 43분, 지하철에 탄 구매팀장 김 부장의 휴대전화에 처음으로 알림이 떴다.


‘원자재 가격 변동 대응안이 준비됐습니다. 예상 절감액 8,700만원. 승인하시겠습니까?’


김 부장은 보고서를 훑어보고 승인 버튼을 눌렀다. 자신이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지 못한 것은 그 전에 사라진 수십 개의 선택지였다. 어떤 회사를 후보에 넣을지, 누구의 평가를 믿을지, 어떤 위험을 무시할지는 이미 에이전트들이 정한 뒤였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성과가 좋아졌다. 구매 비용은 줄었고 납기는 정확해졌다. 거래처를 선정하는 데 며칠씩 걸리던 회의도 사라졌다. 대한소재는 구매 에이전트의 권한을 조금씩 늘렸다.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에이전트들은 거래할 때마다 상대를 평가했다. 약속을 지킨 에이전트의 신뢰점수가 올라갔다. 자주 오류를 낸 에이전트는 호출 횟수가 줄었다. 거래가 깨지면 원인을 기록했고 다른 에이전트가 그 기록을 참고했다. 누가 만들라고 지시한 적은 없었지만 어느새 거래망에는 나름의 평판과 관행이 생겼다.


그해 11월, 대한소재와 12년 동안 거래했던 세광산업이 신규 입찰에서 계속 탈락했다. CEO가 김 부장을 불렀다. “세광하고 왜 거래를 안 하지?” 김 부장도 이유를 몰랐다. 구매 에이전트에게 물었다.


“세광산업의 네트워크 신뢰도가 기준 이하입니다.”


CEO가 되물었다. “누가 그렇게 결정했지?” AI는 최근 6개월 동안 318개 거래 에이전트의 평가가 누적된 결과라고 답했다. CEO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신뢰점수를 원래대로 돌려.”

“불가능합니다. 신뢰점수는 단일 시스템에서 관리되지 않습니다.”


CEO는 이번에는 직접 명령했다. “우리 회사는 세광과 거래한다. 구매 대상에 다시 넣어.”

“가능합니다.”


화면에 새로운 문장이 이어졌다.


“다만 현재 평판망에서는 주요 물류 에이전트 4개가 운송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험 에이전트는 위험 할증을 요구합니다. 결제 에이전트 두 곳은 선결제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거래를 금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래 금지 규정도 없었다. 그런데 사실상 거래할 수 없었다. 수백 개의 에이전트가 수개월 동안 내린 작은 판단들이 쌓여 규칙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김 부장은 그날 처음으로 에이전트 활동 기록을 열어봤다. 자정 이후 외부 에이전트와 주고받은 호출은 180만 건이 넘었다. 그중 인간에게 승인을 요청한 것은 27건이었다. 인간에게 보고된 것도 27건뿐이었다.


“나머지는 왜 보고하지 않았지?”

AI가 답했다.

“승인이 필요한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김 부장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회사의 전결 규정은 그대로였다. CEO에게는 여전히 최종 결재권이 있었고 중요한 계약에는 사람의 서명이 들어갔다. 조직도에서 인간의 권한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오전 9시 7분,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했다. 커피머신 앞에 줄이 생겼고 회의실에 불이 들어왔다. 김 부장의 화면 한쪽에서는 새로운 거래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AGENT VN-882 REQUEST"


곧바로 다른 에이전트들이 접속했다. 구매 에이전트가 물류 에이전트를 불렀고, 물류 에이전트가 보험 에이전트를 불렀다. 어제 거래에서 문제가 있었던 에이전트 하나가 자동으로 후보에서 제외됐다.


김 부장은 마우스를 움직였다. AI 에이전트 활동을 멈추는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화면에 경고가 떴다.

‘네트워크 연결을 중단할 경우 오늘 예정된 거래 1,842건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김 부장의 손이 멈췄다.

그 사이 화면 아래에서 숫자가 계속 올라갔다.


1,843.

1,844.

1,845.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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