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과 낙인 앞서는 시대에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나요?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 아들과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딸을 키우고 있느냐 너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던 걸까요. 어느덧 사십 대 후반이 된 나의 현실이 제법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세대들이 '영포티'를 흉내 낸다고 핀잔을 주기 전에 서둘러 나이든 자신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슬롯 현상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반성하게 된 계기는 지난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세대별 투표 결과 내용을 마주했을 때였습니다. 한 언론사가 정리한 통계를 보니, 젊은 세대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보수 정당을 지지했다고 해요. 슬롯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높은 젊은 층은 당연히 진보적으로 일컬어지는 정당을 지지할 거라는 저의 전형적인 정치공학적 상식이 일순 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요즘 청소년들은 어떨지 궁금해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넌지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얘들아, 요즘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정치나 정치인에 관한 이야기 많이 하니?" 돌아온 아이들의 대답은 제 예상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이들은 특정 정당이나 정바카라을 토론하는 게 아니었어요. 흔히 '일베'로 알려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자극적인 표현이나 밈(meme), 그리고 서로를 조롱하는 언어들을 아이들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함께 의견을 나누며 누군가를 논리로 설득하려는 노력보다는 특정 인물에 대한 비웃음과 그의 추종자들로 낙인찍는 문화가 이미 또래 사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이런 징후는 오래전부터 우리 슬롯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정치 영역은 점점 숏폼 영상과 자극적인 제목으로 소비되고 있고, 유튜브나 SNS는 사실보다는 감정을 먼저 널리 퍼뜨립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만 그 안에 가두어 놓았죠. 그러다 보니 나와 다른 의견을 건강하게 만나는 경험은 점점 줄어들고,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너 내 편이야, 아니야?"를 먼저 확인하는 문화가 어느새 아이와 어른의 구분 없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이제 정치 영역을 넘어 슬롯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즘은 아이돌, 배우, 운동선수, 유튜버는 물론이고 일반 기업들까지도 끊임없이 '사상 검증'의 도마 위에 오릅니다. SNS에 어떤 사진을 올렸는지, 누구를 팔로우했는지, 심지어 어떤 브랜드의 제품을 썼는지까지 하나하나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되고는 합니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조차 정치적 메시지로 읽히는 무서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논란을 부추긴 것이 스타벅스의 일베 이벤트 마케팅 사례입니다. 분노한 많은 시민이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스타벅스를 이용하자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태도보다 더욱 씁쓸한 것은 이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상적인 소비마저도 정치적 고려를 해야 하는 현실은 너무 고단한 한국 슬롯의 현실을 방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학에서는 민주주의를 '다양한 의견이 건강하게 경쟁하는 제도'라고 말합니다. 벨기에의 정치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정치를 서로를 말살해야 할 '적대'가 아니라, 룰 안에서 정당하게 싸우는 '경쟁'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의견보다는 진영이 먼저 보이고, 정바카라보다는 인물이, 논리보다는 편 가르기가 먼저 소비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보다 "누구 편이냐"를 먼저 묻는 슬롯가 된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할 때면 오래전 읽었던 이청준 소설가의 <소문의 벽>이라는 작품이 떠오릅니다. 소설 속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이 한밤중에 민가를 급습해 방 안의 사람들에게 랜턴 불빛을 비추며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는 어느 편이냐?" 하지만 방 안의 사람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강한 랜턴 불빛에 눈이 멀어, 눈앞의 군인이 국군인지 인민군인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대답 한마디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극단적인 공포의 순간을 작가는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때처럼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 중은 아니죠. 하지만 그 소설 장면이 말하고자 했던 구조적 상징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총을 겨누지는 않지만, 대신 스마트폰이라는 차가운 불빛을 서로의 얼굴에 비추며 '너는 어느 편이냐'를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관계를 끊어버리고, 구체적인 정보도 없이 비난하며, 온라인 마녀사냥을 시작합니다. 상대의 삶과 판단의 맥락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정치적 정체성부터 확인하려는 문화가 우리 슬롯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 성향의 차이를 넘어선 심각한 슬롯 문제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는 힘을 우리는 '슬롯적 자본'이라고 부르잖아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제도가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 흐르는 두터운 '신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슬롯는 그 신뢰라는 강줄기가 너무나 빠르게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대화가 끊기고, 알고리즘은 우리를 더 멀리 갈라놓습니다. 조롱과 혐오는 클릭 수를 높여줄 뿐, 결코 신뢰를 만들어내지 못하니까요. 당연히 공동체를 위협하는 가짜 뉴스나 혐오 표현에는 분명한 기준과 바카라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마저 진영 논리에 따라 고무줄처럼 바뀌고,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검증하려 든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지옥 같은 슬롯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나랑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여 사는 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불편한 타인들이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배우는 제도입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상대를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대화하고 공존하는 기술이어야 합니다. 다만 그 공존이란 하나의 슬롯적 기준을 가져야겠지요. 조롱과 비아냥은 당연히 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문득 훗날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의 시대를 돌아보면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워집니다. 민주주의가 더 성숙해지기 위한 성장통을 겪은 시기라고 기억할까요? 아니면 슬롯 분열을 막지 못해 무너져 내린 붕괴기로 기억할까요? 어쩌면 지금이 이 분열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 슬롯가 머리를 맞대야 할 마지막 골든타임일지도 모릅니다. 집의 한쪽 기둥이 무너지면, 다른 쪽 기둥이 아무리 튼튼해도 집 전체가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색출하고 배제하는 슬롯는 결국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사상 검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보의 바탕 안에서 무너진 신뢰를 다시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은 더 강력한 진영이 아니라, '서로 달라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단단한 믿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지켜야 할 진정한 품격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