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투병 #무빈소 #장례식
어느 여름날이었다. 7평 남짓한 동네 반찬가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마른 체형에 예의 바르고 탐색하듯 조용한 목소리였다. 내가 흙 묻은 장화라면 그녀는 연구실의 하얀 가운 같았다.
어느 날 그녀는 중학생이 된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3년이 안 됐을 무렵 오른쪽 가슴의 통증으로 귀국했다. 재발률 높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부산 친정집으로 병문안을 갔을 때, 그녀는 꽃무늬 베이지색 두건을 쓰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밝게 우리를 맞았다. 그때 우리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나는 의무적으로 찾아간 심방이라 생각했고, 마음은 이미 해운대 바닷가에 가 있었다.
항암을 중단한 뒤 그녀는 화천의 단식원에 머물렀다. 다시 찾아갔을 때 얼굴은 밭일하는 사람처럼 까맣게 탔지만,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재발율 높은 암은 그녀를 피해가지 않았다. 1년 만에 전신에 암이 퍼졌고 청평의 한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해 교우들과 그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 카드’를 샀다며 타로 카드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유방암 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코로나에 그녀는 정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암은 줄어들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 나와 청평 숲속의 암환우 숙소로 옮긴 뒤 그녀는 혼자 지냈다. 고양시로 오는 게 어떠냐고 묻자 말이 없었다. 대신 버섯찌개가 맛있는 식당과 빵 카페로 데려갔다. 해가 질 때까지 일상의 얘기를 나눴다.
어느 날 그녀가 남양주의 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림프쪽 혈관이 터져 치료를 받았다. 며칠 뒤 교인들과 찾아갔다. 내가 그녀의 보호자로 사인을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정말 맛있는 김치찌개 집이 있다며 꼭 가보라고 했다. 그녀는 문 앞에서 가냘픈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이듬해 초겨울, 그녀가 고양시 공원 앞 주공아파트로 이사했다. 집 안에는 햇볕이 넘실대듯 들어왔다. 집들이에 초대했다. 그녀는 에피타이저와 본식, 후식까지 준비해 점심을 차려주었다. 나는 빈손이었다. 근처에 나가 밥을 사주려고 했는데 일상의 모든 과정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그녀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게 했다.
그녀가 온 뒤 고봉산과 정발산으로 맨발걷기를 하며 산바카라하고 일상을 보냈다. 집밥처럼 해주는 식당을 찾아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다. 프랑스식 빵과 커피가 맛있는 집도 발견해 시덥지 않은 얘기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유독 잘 맞았던 건 19금 농담이었다. 내가 한 발 나가면 그녀는 수십 미터를 더 나갔다. 결국 내가 먼저 백기를 들곤 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든 맛있는 곳을 찾아냈다. 부산에서는 빵이 맛있는 카페를, 청평에서는 시골 카페를, 남양주 병원에서는 김치찌개집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먹이고 대접하는 쪽으로 늘 열려 있었다.
그렇게 9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녀와 마지막을 준비해야 했다. 교인중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었다. 발도로프 교육에서 손으로 사람 몸을 만져주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녀에게 해보자고 했다. 림프가 막혀 오른쪽 팔과 손 다리가 크게 부어 있었다. 그녀를 끼고 양쪽에서 목과 등, 발목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나도 전문적으로 배운적은 없지만 심하게 부어 있는 팔에 가볍게 손을 얹고 마음속으로 되뇌였다.
‘저를 통해 순환이 이뤄지게 하소서’
그녀는 통증으로 며칠동안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우리가 침묵 속에 순환이 되기를 기원하는 동안 오른쪽으로 고개를 떨구더니 깊은 잠에 빠졌다. 우리 셋은 알 수 없는 전류를 느꼈다. 이렇게 열 사람이 달라 붙어 기운을 주면 아픈 사람이 나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이구야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다‘ 고 힘없이 내뱉었다. 나는 그녀의 코로나 카드처럼 완치의 기적을 믿었다. 하지만 가족들과 장례 절차를 논의했다는 소식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통증 관리를 위해 암센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했다. 며칠 뒤 임종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복음병원에서 무빈소 장례식을 치른다고 했다.
가족이 많지 않아 동생과 아들, 남편이 참석 했다. 관을 들 사람들이 없어서 어쩌나 여자들이 들어야 하나 싶었다. 다행히 남자 교우들이 온라인 게임에 반차를 내고 참석했다. 사람들이 적을까 염려하는 심정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무빈소는 빈소를 차리지 않고 조문객을 받지 않는다. 입관 절차를 하자마자 화장장으로 간다. 20평 남짓 돼 보이는 입관실에서 장례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급식실에서 음식을 옮길 때 사용하는 바퀴 달린 철제 선반처럼 생긴 직사각형의 식탁 2개를 붙여 놓았다. 그녀가 거기에 누워 있었다.
누런 삼베 옷과 빨간코가 있는 버선을 신고 있었다. 그녀를 가운데 두고 ㄷ자형으로 검은색 상복을 입은 조문객들이 띠처럼 둘렀다. 장례 예배가 진행됐고 한 사람씩 그녀에게 다가가 기도를 하거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자기야... 자기 놀리는 재미로 살았는데.... 우리 곧 만나자‘ 하며 울음을 삼켰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게 싫었을까? 아니면 우리 모두 죽음을 피해갈 수 없는게 뭐 그렇게들 우냐고 얘기하고 싶었을까?
교회에 태평양 바다처럼 마음이 넓은 언니가 계시다. 반찬가게를 한 솜씨로 서른명 남짓이 되는 교인들에게 고급 식재료로 음식을 해주시곤 했다. 키는 150cm이지만 배구공 두 개를 껴안은 것처럼 가슴이 컸다. 너희들 ’가슴으로 인덕션 켜봤니‘ 해서 주변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품이 넓고 인자한 언니는 잠을 자는 것처럼 눈을 감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거룩한 순간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실까 젖은 눈으로 응시했다.
언니는 그녀를 안아주려는 듯 팔을 뻗어 몸을 숙였다.
그런데 철제 선반이 시신과 함께 사선으로 움직였다.
언니는 그녀의 머리 쪽으로 갔다가, 다시 다리 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팔을 뻗었다.
그럴때마다 가슴이 먼저 선반에 닿아 내쪽으로 밀려 그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입관을 주관하는 직원이 짜증 섞인 말투로 다른 직원에게 ’저거 똑바로‘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재빨리 벽을 향해 돌아섰다. 사람의 감정이라는게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서럽게 울다가 웃음이 터져나와 혼신의 힘을 다해 ’울어야 해!! 울어야 해!!! 웃으면 안돼!!! 안돼!!!‘하며 절규 했다.
입관 예배가 끝나고 곧바로 벽제 승화원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잠자는 것 같았던 그녀는 1시간만에 작은 상자에 담겨 가족들 품에 안겼다. 옛날에 나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마루에 위패를 모셔 놓고 휘장을 둘러 마치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침 저녁으로 조석 상식을 올렸던 기억이 났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물리적으로 이별한 뒤 서로를 애도하며 함께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싶었다. 미리 가족들과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그대로 따랐지만 죽음 뒤에 마주한 ’상실감‘에 대해서는 미처 몰랐던 것 같다.
그녀는 치병 중에도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꽃을 보냈다. 안부를 물었다. 그녀를 챙긴 사람들도 학부모의 관계이거나 교회에서 본 게 전부인데 친인척 이상으로 챙기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선하구나 싶었다.
한편으론 그녀가 자신의 ’병과 사’를 통해 주위 사람들이 공덕을 쌓을 기회를 줬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독교의 ‘죄’와 불교의 ‘업’이 같은 의미라면 우리가 그것을 소멸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평소 미뤘던 용서와 화해를 ‘병사’ 앞에서 만회하곤 한다.
언젠가 나의 ‘병과 사’를 마주할 때 주변의 도움이 부담감이 아니라 선물이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