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17분.
김도윤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TV를 바라봤다.
화면 속 백악관 대변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대통령은 코리아주의 특별자치 권한과 연방 예산 지원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지시했습니다.”
앵커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주 정부가 중국과의 독자적인 경제협정을 추진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도윤은 리모컨으로 소리를 줄였다.
“또 시작이군.”
아내 수진이 식탁에 앉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뭐가 문제래?”
“우리 주지사가 대통령 말을 안 들었어.”
“그게 체포할 일이야?”
“당신도 워싱턴에서 일했잖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백악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김도윤입니다.”
“미스터 김, 오전 비행기로 워싱턴에 오시죠?”
“예정대로입니다.”
“좋습니다. 도착하면 백악관 서쪽 출입구로 오십시오.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만나겠답니다.”
도윤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로요?”
“주지사 문제입니다.”
“그건 주 정부와 백악관이 해결할 문제 아닙니까? 제가 끼어들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상대방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지사가 대통령의 사임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사임을 요구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유는요?”
“그 문제는 도착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혹시 제가 검토한 중국 관련 협상 문서 때문입니까?”
상대방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면 충분했다.
“워싱턴에서 뵙겠습니다, 미스터 김.”
전화가 끊겼다.
도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주지사가 대통령의 사임 요구를 거부한 것도 문제였지만, 백악관이 자신을 직접 부른 이유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는 주 정부와 연방정부 사이의 협상 문서를 검토했을 뿐이었다. 최종 결정권자는 주지사였고, 협상 상대는 연방정부였다. 문서가 유출됐다면 조사할 일은 맞았다.
하지만 왜 하필 자신을 백악관으로 부르는 걸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코리아주 주지사실이었다.
“김 수석님, 워싱턴에 가시면 안 됩니다.”
비서실장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침부터 다들 왜 이러십니까? 이유를 말씀하시죠.”
“백악관이 수석님을 기밀 유출 혐의의 핵심 인물로 지목하려 한다는 정보입니다.”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제가 유출했다고요?”
“수석님이 마지막으로 검토한 문서가 언론에 공개됐습니다. 백악관은 그 문서가 주 정부에서 유출됐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 문서는 연방정부에도 전달됐습니다. 원본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죠.”
“문제는 원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백악관이 확보했다는 원본에는 수석님이 접근한 적 없는 부속자료가 포함돼 있습니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누군가 문서를 조작했다는 겁니까?”
“저희도 그렇게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게 없습니다.”
“주지사님은요?”
“사임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석님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비서실장이 잠시 말을 멈췄다.
“이번에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요.”
통화가 끊겼다.
도윤은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아침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출근길 차량이 도로를 메웠고, 카페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건물 외벽에 걸린 성조기가 바람에 흔들렸다.
미국의 51번째 주.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미국은 외국이 아니었다. 달러로 월급을 받고,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하고, 연방정부의 정바카라에 따라 삶이 바뀌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도 워싱턴은 코리아주를 다른 주와 똑같이 대하지 않았다.
연방 예산을 배정할 때도, 외교와 안보 정바카라을 결정할 때도 코리아주에는 늘 별도의 조건이 붙었다. 특별자치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그 특별함이 권리인지 족쇄인지는 누구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도윤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가 없는 문자였다.
'워싱턴에 도착하면 당신은 기밀 유출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됨'
도윤은 답장을 보내려다 멈췄다.
곧이어 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
'주지사는 사임하지 않을 것임. 당신은 그 과정에서 희생될 것임'
도윤은 화면을 응시했다.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협박이라면 보낸 사람은 정부 내부 사정을 알고 있었다.
세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날, 미국은 한국의 미래에 관한 또 다른 결정을 내렸음'
도윤의 손가락이 멈췄다.
1953년 7월 27일.
그날 한반도에서는 전쟁을 멈추기 위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 한국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됐다. 적어도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그랬다.
문자는 그보다 더 불길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한국을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도윤은 곧바로 발신자를 추적하려 했다. 아무런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밤 11시. 옛 중앙청 . 1953년의 기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혼자 오십시오.'
“여보, 무슨 일이야?”
수진이 다가왔다.
도윤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워싱턴 출장을 취소해야겠어.”
“아까는 간다며?”
“계획이 바뀌었어.”
“무슨 계획?”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 지금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지?”
그는 아내를 바라봤다.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수진은 그가 거짓말할 때면 언제나 먼저 알아차렸다.
“아직은 나도 몰라.”
“그게 무슨 대답이야?”
“정말이야. 지금은 나도 아무것도 몰라.”
도윤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TV에서는 백악관 대변인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은 코리아주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한 기자가 물었다.
“주지사가 사임을 거부하면 연방정부가 직접 개입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대변인은 잠시 카메라를 바라봤다.
“대통령은 모든 선택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도윤은 TV를 껐다.
백악관은 주지사를 압박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기밀 유출 사건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물은 73년 전의 기록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세 사건이 서로 연결돼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누군가는 그가 워싱턴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도윤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밤에 확인할 게 있어.”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성조기가 보였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깃발이었다. 학교 운동회에서도, 졸업식에서도,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그 깃발은 늘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미국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도윤은 그 이유를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문자 한 줄뿐이었다.
'김도윤 씨, 당신의 할아버지는 한국이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사람입니다.'
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 밤 확인해야 할 것은 국가의 비밀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가족이 감춰 온 역사까지, 그곳에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