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안을 공감이라 착각한다

남의 기분까지 바카라임지는 순간 공감은 사라진다

byBeomView

누군가 표정을 굳히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생각한다.

답장이 늦으면 혹시 기분이 상했나 걱정하고, 회사에서 상사의 말투가 달라지면 하루 종일 이유를 찾는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두고 종종 '공감 능력이 높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는 불안을 공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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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함께 흔들리는 능력이 아니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상대가 슬퍼한다면 왜 슬픈지 헤아릴 수 있고, 화가 났다면 그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상대의 감정과 나의 감정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저 사람이 지금 화가 났다.”

여기까지는 공감이다.


그런데 곧이어 이런 생각이 든다면 조금 다르다.

“혹시 내가 잘못했나?”

“빨리 기분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때 관심의 중심은 어느새 상대에게서 나에게로 이동한다.

상대가 왜 화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 때문에 생긴 내 불안을 없애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타인의 정서가 자신에게 그대로 옮겨오는 현상을 ‘감정 전염’이라고 설명한다.

공감과 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다르다.


공감은 상대를 바라본다.

불안은 상대를 통해 나의 안전을 확인한다.


착한 사람은 왜 항상 지치는가

이 차이를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다.

싫은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갈등이 생기면 자신이 조금 손해 보는 쪽을 선택한다.


겉으로 보면 배려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모든 배려가 상대를 위한 것은 아니다.

거절했을 때 상대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다.

자신의 말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의견을 접기도 한다.


이때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친절만이 아니다.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함께 움직인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쉽게 지친다.

계속 다른 사람의 기분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오래 살다 보면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점점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불친절한 사람이 된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한국 슬롯에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을 슬롯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상황을 빨리 읽고,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눈치는 중요한 슬롯적 능력이다.

하지만 지나친 눈치는 다른 방향으로 작동한다.


상사의 표정이 어두우면 자신의 업무를 떠올린다.

친구의 답장이 평소보다 짧으면 방금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어본다.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 조용하면 자신이 분위기를 살려야 할 것 같은 바카라임감을 느낀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주변의 표정과 말투를 읽는다.

그런데 그 목적이 언제나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괜찮은가.”


상대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관계가 안전한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치가 지나치게 빠른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쉽게 지친다.

남을 너무 많이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남의 감정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계속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모두를 편하게 하면 좋은 리더일까

조직생활에서도 같은 문제가 생긴다.

회의에서 누군가 내 의견에 반대한다.


건강한 정서적 경계를 가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내 의견에 반대한다.”

하지만 감정과 의견을 분리하기 어려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를 싫어하는 건가?”

그러는 순간 의사결정의 기준이 바뀐다.


‘무엇이 맞는가’보다 ‘누가 불편해하는가’가 중요해진다.


하지만 회사에서 좋은 결정은 언제나 모두를 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잘못된 사업을 중단해야 할 수도 있고, 성과가 나오지 않는 방식을 비판해야 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때 모든 사람의 감정을 자신의 바카라임으로 받아들이면 필요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좋은 리더에게 필요한 공감은 무조건적인 동조가 아니다.

직원의 어려움을 이해하되 판단까지 넘겨주지는 않는 것이다.


상대가 실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필요한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냉정함이 아니다.


감정과 판단 사이에 경계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다.


부모의 사랑에도 불안이 섞일 수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는 이 경계를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

아이가 울면 부모도 아프다.

친구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신 해결해주고 싶고, 실패할 것 같으면 실패하지 않는 길을 만들어주고 싶어진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사랑과 불안은 때때로 같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을 때 부모가 말한다.

“많이 아팠구나.”

아이의 감정을 인정하고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부모가 견디지 못해 모든 문제를 먼저 제거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친구와 갈등이 생기면 대신 해결하고, 실패할 것 같으면 미리 개입한다. 조금이라도 속상해하면 그 상황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겉으로는 사랑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부모 자신의 불안도 숨어 있을 수 있다.

“내 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내가 견딜 수 없다.”


아이의 고통을 없애주려는 행동이 어느 순간 부모 자신의 불편함을 없애는 행동으로 변하는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에게 슬픔이 없는 인생을 만들어주는 일이 아닐 것이다.


슬퍼할 때 곁에 있어주면서도 그 감정을 스스로 통과할 기회를 남겨주는 것에 더 가깝다.

사랑하되 대신 살아주지 않는 것이다.


공감에는 반드시 경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공감을 상대와 함께 아파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숙한 공감은 조금 다르다.


상대가 힘들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까지 내가 바카라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타인의 실망을 모두 막을 수도 없고, 분노를 모두 해결할 수도 없다.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것을 계속 시도하면 관계 역시 이상해진다.


한 사람은 끊임없이 상대의 감정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다룰 기회를 잃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경계 없는 공감이 희생으로 변하고, 희생이 오래되면서 억울함으로 돌아온 것이다.


좋은 사람은 모두를 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좋은 사람’의 정의인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은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감정 역시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상대가 실망하더라도 필요한 거절을 할 수 있다.

누군가 화를 냈을 때 그것이 자신의 바카라임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할 때 그 고통을 빼앗으려 하지 않고 곁에 머무를 수 있다.

그래서 진짜 공감은 생각보다 단단하다.


상대를 이해하지만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상대의 인생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과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 중 일부는 공감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갈등을 피하고 싶은 불안이었다.

타인의 불편함을 견디기 힘든 마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배려’와 ‘공감’이라는 좋은 이름을 붙여왔는지도 모른다.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가장 많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당신의 감정은 당신의 것이고, 나의 감정은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가장 성숙한 공감일 것이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핵심은 단순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정보가 아닌 ‘프레임’을 건넵니다.
- 범뷰(BeomVie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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