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때로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뜻의 문장을 남겼다.
“인생은 뒤를 돌아보아야 이해할 수 있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
삶은 언제나 뒤늦게 이해된다.
어떤 선택이 잘못이었는지, 그 말이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당시에는 왜 보이지 않았는지를 우리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지금의 나는 결과를 알고 있다.
무엇을 잃었는지도 알고, 그 일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도 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과거의 나를 불러 세운다.
왜 그것도 몰랐을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인간은 늘 뒤늦게 똑똑해진 자신으로 과거의 자신을 심판한다.
때로 그 재판은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끌어와 오늘 하루까지 무너뜨린다.
심리학에서는 결과를 알고 난 뒤, 그 일이 처음부터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고 느끼는 현상을 ‘후견지명 편향’이라고 한다.
시험이 끝난 뒤 정답을 보면 문제가 쉬워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현재의 나는 정답지를 들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나는 정답 없이 문제를 풀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사실도 당시에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였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재의 지식과 기준을 과거의 자신에게 요구한다.
“그때 왜 몰랐지?”
이 질문은 조금 불공평하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과거의 잘못을 무조건 용서하자는 뜻은 아니다.
바카라임질 일은 바카라임져야 한다.
다만 당시에는 가질 수 없었던 지혜까지 요구하며 자신을 처벌하는 것은 성찰이라기보다 뒤늦은 공격에 가깝다.
나도 예전에는 과거의 나를 자주 심판했다.
지나간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혼자 부끄러워했다.
이미 끝난 장면을 계속 반복했고, 그때마다 그 시절의 나를 조금씩 미워했다.
그러다 어느 날 생각이 달라졌다.
과거의 내가 부끄럽다는 것은 지금의 내가 그때와 달라졌다는 뜻 아닐까.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이 지금은 거슬린다.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타인의 마음이 이제는 보인다.
옳다고 믿었던 행동 속에서 이기심과 조급함도 발견한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은 미숙함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기준이 이동했다는 증거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과거의 나를 낯설게 느낄 이유가 없다.
같은 기준으로 생각하고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예전의 선택은 지금도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과거의 내가 낯설어진 것은 그 자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심판의 날’이 조금 반가워졌다.
자주 찾아오는 날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나를 떠올리다가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때보다 멀리 왔다.
이제는 저 행동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부끄러움이 나를 벌주는 감정에서 내가 얼마나 이동했는지를 알려주는 감정으로 바뀐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감정의 반응을 바꾸는 것을 ‘인지적 재평가’라고 한다.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내뱉은 말도 끝난 선택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달라지는 것은 그 기억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예전에는 과거의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내가 형편없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부끄럽다는 사실은 내가 달라졌다는 증거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감정이 맡은 역할이 달라졌다.
나를 찌르던 기억이 성장의 거리를 재는 표시가 되었다.
심판의 증거물이 변화의 증거물로 바뀐 셈이다.
이것은 자기합리화와 다르다.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바카라임을 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더 분명하게 바라본다.
다만 잘못한 행동과 나라는 사람 전체를 구분한다.
‘그 행동은 미숙했다’와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첫 번째 문장은 다음 행동을 바꾼다.
두 번째 문장은 사람을 과거에 묶어 둔다.
자기연민은 자신에게 무조건 관대해지는 태도가 아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부족함 때문에 자신 전체를 공격하지 않는 태도다.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아는 것이 적었다.
두려웠고 조급했고,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의 모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나 역시 과거의 나와 무관하지 않다.
그 사람이 실수하고 후회하며 살아온 끝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과거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현재의 나를 만든 시간까지 함께 부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이 찾아왔다고 해서 유죄판결만 내릴 필요는 없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같은 상황에서 이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 기억은 더 이상 나의 결함을 입증하는 최종 판결문이 아니다.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졸업장이다.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인간은 뒤를 돌아보아야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은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는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래된 자신을 계속 끌어내 처벌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이해하고, 다음에는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다.
성장은 과거의 내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성장할수록 예전의 자신에게서 더 많은 미숙함이 보일 수 있다.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부끄러움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이다.
과거의 나를 미워하는 데 사용하면 후회로 남는다.
오늘의 행동을 바꾸는 데 사용하면 성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제 나는 가끔 찾아오는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날은 내가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확인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그 부족함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확인하는 날이다.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지는 날은 그 사람을 다시 벌주는 날이 아니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핵심은 단순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정보가 아닌 '프레임'을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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