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 주부, 김치 강사가 되다

by정숙진

"나, 김치로 다이어트하려고 그러는데..."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 J가 한 말이다.


서로의 가정과 온라인 게임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필리핀 출신인 J가 대뜸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TV 화면으로 접하는 연예인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 만난 사람까지 한국인은 죄다 날씬하니, 분명 한식에 특별한 비밀이 있을 거라 여기는 이가 종종 있다. J는 이에 한술 더 떠, 김치가 다이어트 무기이자 건강식품이라 확신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얼마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람이 맵고 짠 김치를 샐러드처럼 매 끼니마다 잔뜩 챙겨 먹겠다고 하니 우려가 되었다. 소금 함량이 높은 음식이니 소량만 먹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는 김치 담그는 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우리 집에서 만들어보자 제안했지만, 서로 가까이 살지 않아 무리였다. 아쉬우나마, 내가 이메일로 요리법을 보내주는 선으로 결론이 났다.



"이건 외국인이 올린 비디오군..."


유튜브를 검색하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었다.


J에게 보내줄 영상을 찾고 있을 때였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김치 담그기를 직접 시범 보이지 않고 글자, 사진만으로 이해시키기는 힘들다 싶어 비디오를 검색하던 참이었다.


이날 찾은 동영상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인이 올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외국인이 올린 것이다.



한국인이 만든 비디오와 외국인이 만든 비디오에 차이가 있나?


단순히 영상에 나오는 사람과 언어만 지적하는 건 아니다.


한국인이 만든 김치 비디오는, 요리사가 직접 출연하여 김치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 가득한 말투로 요리를 진행한다. 특히, 정통 포기김치 담그는 법을 시범 보인다. 출연자가 영어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어로 나오는 영상에 영어 자막을 달기도 한다.


반면, 외국인이 만든 김치 비디오는 영어나 그 외 언어는 있지만 한국어는 없다. 무엇보다, 포기김치가 아닌 겉절이를 다룬다는 차이점이 있다.


조리와 보관의 어려움으로 한국인인 나조차 포기김치를 '포기'할 정도인데, 한국에서처럼 전용 냉장고를 구비해 놓고 일 년 내내 김치를 먹을 일 없는 외국인에게 처음부터 포기김치를 가르치는 건 무리다. 대신, 겉절이야말로 이들이 시도할 수 있는 최선의 김치리라.


무엇보다, 외국인이 만든 비디오임을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재료나 조리 방식에 엉뚱한 요소가 한두 가지씩 나온다는 점이다.


가령... 김치에 액젓 대신 간장을 쓴다거나, 버무려진 김치에 맹물을 붓는 식이다.


추측 건데, 이들은 김치를 배우긴 했으나, 재료나 조리법을 혼동했으리라. 혹은, 재료 조달의 어려움으로 또는 식성에 따라 조리법을 변형했을 가능성도 있다.



kimchi.png@LiveEatLearn



이런 영상을 누가 만들까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십수 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재료 준비해 두었으니 오늘은 꼭 가르쳐줘!”


같은 기숙사에 사는 D의 말이다.


남편과 내가 처음 영국에 와서 살던 곳은 부엌과 화장실, 욕실을 두 가정이 공유하는 기숙사였다. 이때 같이 살던 이들이 중국인 부부였다. 다들 나이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해서 마주치기만 하면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넉넉히 만들어 나눠먹는 일도 잦았다. 식사 시간이 맞으면 서로의 요리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어느 날 이 부부가 나더러 김치 만드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둘 다 상하이 출신으로 그곳에 흔한 한국 식당을 자주 이용한 데다, 관광가이드인 친정어머니가 한국을 드나들며 먹거리를 종종 사 왔다고 한다.


지척에 있는 한국인에게 배우려는 의도를 이해는 하지만, 완전 초짜 주부인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하게 요리를 하는 이들의 부탁이라 꺼려졌다.


한국인이 보면 웃어버릴 정도로 형편없는 김치를 어떻게 타인에게 가르치나 싶고, 고국을 망신시킬 수 없다 싶어 이들의 청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계속 알려 달라 나왔다.


은근 신경전을 벌이며 시간을 보내던 중, D 부부가 이사 갈 시기가 되었다. 이제, 이들의 끈질긴 요청에서 벗어나는구나 했지만 이사를 앞둔 마지막 주말 저녁, 다급해진 D가, 외출하려는 나를 문 앞에서 막아서고는 제발 오늘은 꼭 김치를 가르쳐달라 나왔다.


그동안 정들었던 이웃이 이사를 간다는데 더 이상 거절할 변명도 없었다. 재료도 준비되고, 아무리 초보 주부의 김치라 해도 자기들이 먹어보고 맛있다는데.


그래도, 다짐 하나는 받아내기로 했다.



“절대 이 김치, 다른 한국인에게 보여주면 안 돼, 알았지?”


우선 이들이 사놓은 재료부터 살펴봤다.


배추는 영국에서 ‘Chinese leaves’라 부르는 만큼 중국인도 많이 쓰는 식재료니 제대로 사두긴 했는데, 진간장은 왜?


아마도, 우리 집 찬장을 열어보거나 내가 요리할 때 어깨너머로 보다가 이를 김치 재료로 오해했으리라. 설상가상으로, 김치에 쓰는 고운 고춧가루가 아닌 중국식 굵은 고춧가루를 가져다 놓았다. 한숨이 나올 지경이지만, 당장 우리도 고춧가루가 부족한 때라 이거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마, 진간장을 넣을 순 없으니 우리 집 액젓을 보태기로 했다.


절여둔 배추에 마늘과 생강을 빻아 넣으면서 '이래도 김치가 되겠나' 반신반의했다. 부족한 요리 솜씨가 부끄러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D 부부는 내 말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 초집중했다. 수첩에 기록까지 하면서.


모든 재료를 집어넣고 버무리며 '제발 붉게 물들어라, 물들어라' 속으로 외쳤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씨가 듬성듬성 보이는 굵은 고춧가루가 배추 사이에 박혀 모든 재료가 제각각 노란색, 붉은색, 흰색으로 겉돌았다. 백김치도 아니요 붉은 김치도 아닌 점박이 괴물이 탄생했다. 다 만들어놓고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엉터리 김치를 맛본 두 사람이 맛있다고 난리가 났다. 평소에도 흥이 많은 D는 그 자리에서 춤까지 췄다. 이 무슨 상황인지.


이 정도로 만족할 줄 알았다면 진작 재료를 갖추어 놓고 가르쳐줄걸 후회마저 들정도였다.


이처럼 반강제로 시작한 김치 강사 역할이지만, 내가 만든 김치에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누구든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리라 결심마저 했다. 그런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애도 없고 신혼 시절이라 친구들과 파티를 자주 하고 늦은 시간까지 놀던 때였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친구의 요청으로 찾아갔더니, 학생들이 단체로 주방에 몰려와 내가 김치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고 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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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 대만,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 출신 유학생들에게 김치를 가르쳐주던 날이다.


김치가 완성되자, 자리에 모인 이들의 머릿수, 국적수대로 요리가 하나씩 탄생하고 즉석에서 세계의 요리 향연이 펼쳐졌다.



"내가 만든 김치 먹어볼래?"


남편이 키운 김치 제자 N의 말이다.


싱가포르 출신인 그가 직접 만든 김치를 학교에 가져온 날이다.


남편의 요리 철학은 '무조건 예쁘게'다. 이런 스승에게 배워 만든 김치니 외관상으로는 훌륭했다고 한다. 당사자인 N도 엄청 뿌듯해하고 남편마저 감동할 정도로.


물론, 김치를 맛보기 전까지만.



"앗... 왜 이렇게 짜지?"


남편이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소금 덩어리를 씹는 맛이 났다고 한다.


알고 보니, 배추를 절일 때 뿌리는 소금을 양념이라 착각한 N은 절인 배추를 물에 헹구지 않고 그대로 다른 양념과 섞었다고 한다. 짠맛이 얼마나 강하겠는가.


실제로, 외국인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치면, 절임과 헹굼 과정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남편의 김치 제자 중에는 학과 교수도 있다. 학창 시절 한국인 친구로부터 김치를 전수받은 경험 덕택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남편에게 다시 배운 셈이다.



"나도 만들어봐도 돼요?"


아들도 남편의 김치 제자다.


한동안 나 혼자 김치를 담그던 시절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김치 재료만 대령해 놓고 남편이 양념으로 버무리는 일을 담당했다. 같은 재료라도 남편의 억센 주먹으로 버무리면 김치가 더 화사하게 물들고 맛도 좋아졌다.


아빠가 하는 일은 뭐든 흥미 대상으로 여기는 아들이니 아빠가 만드는 김치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남편의 김치 제자가 집에도 생겨난 덕택에 나는 김치 업무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두 부자가 재료 다듬기와 양념 준비, 버무리기까지 도맡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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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와 남편이 키운 김치 제자들이 영상을 올리고 있을지도.


간장 넣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김치에 물이 저절로 생겨날 거라 했는데...


끝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