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휴대폰 액정에 금이 갔다.
오래 쓴 폰이었다. 패션디자인을 공부하는 딸은 그 폰으로 인스타그램 사진도 찍고, 아는 선생님의 웨딩 촬영까지 해주었다. 프로급은 아니어도, 찍어 달라는 사람이 있을 만큼은 찍었다.
새 연습실을 마련한 작곡가 아들에게 망설이던 야마하 피아노를 선물하고 나니,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았다. 늘 오빠보다 못해준 것 같았다. 용돈을 아껴 최신 아이폰을 사주었다. 가변 렌즈가 달린 것으로.
2주도 못 되어 전원이 저절로 꺼지기 시작했다. 불량이었다. 교환을 신청하니 수거해서 검수한 뒤 다시 보내준다고 했다. 8일이 걸린다고 했다. 딸은 금 간 폰을 다시 꺼내 쓰고 있었다.
쓰고 싶은 것을 다 참고, 앞으로 쓸 용돈까지 줄여서 사준 것인데. 일주일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10월 1일에 회수해 가더니 오늘에서야 도착한다는 알림이 떴다. 화면을 닫았다.
루체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딸의 폰이었다.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가족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서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겨울인데도 그곳은 날씨가 온화했다. 루체른 호수에는 백조들이 노닐었고, 물결이 움직일 때마다 호수에 비친 산 그림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호숫가 풀밭은 겨울을 모르는 듯 초록이었다. 길가에는 침엽수 사이로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섞여 서 있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건넜다. 산기슭 초지에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저런 곳에 한 달만이라도 머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착장에 내리자 붉은색 산악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기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열차였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체 아래에서 톱니 맞물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드르륵, 드르륵. 느리고 단단한 소리였다. 열차는 서두르지 않았다. 한 칸씩, 한 칸씩, 산을 물고 올라갔다.
딸이 창가에 달라붙었다.
호숫가의 집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울타리 너머로 빨래가 걸린 마당, 지붕 위에 쌓인 장작, 정원의 나무 아래 놓인 벤치. 농가의 갈색 나무 지붕이 한 채, 두 채 보이다가 사라졌다.
목초지가 넓어졌다. 소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열차 안의 승객들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기대를 품고 올라가는 시간이 좋았다.
산허리를 돌자 호수가 다시 나타났다. 가까이에서는 초록이던 물이 높은 데서 내려다보니 짙은 남색이었다. 한 번 더 돌자 그 호수가 등 뒤로 넘어가고, 반대편 비탈 아래로 다른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호수 둘이 마주하고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고도가 높아지자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사방이 캄캄해지니 이러다 못 내려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내가 나를 봤다. 괜찮은 거냐는 눈치였다. 나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아까까지 창에 붙어 있던 딸이 몸을 뒤로 빼고 등받이에 기댔다.
어둑한 창밖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초록 풀밭을 보며 올라왔는데, 창밖은 한겨울이었다.
정상에 오르자 온 세상이 하얬다. 잿빛 구름을 뚫고 올라왔더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못 내려가면 어쩌나 하던 걱정은 그새 잊었다.
흰 눈 사이에 산악열차가 서 있었다. 붉은 기관차 앞에서 다들 인증샷을 찍느라 바빴다. 하얀 눈 속에서 빨간색은 무척 따뜻해 보였다. 올라올 때는 눈여겨보지도 않던 열차였다.
아내와 딸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고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와 아들은 말없이 눈 속을 함께 걸었다. 누가 먼저 걷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산도 하늘도 땅도 경계가 사라졌다. 어디선가 다른 여행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조그만 눈사람을 딸이 발견하고 아내를 불렀다. 아내가 또 웃었다.
"와, 여기 진짜 러브스토리 배경 같다."
딸이 말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러더니 외투를 입은 채 눈밭에 뒤로 누웠다.
하늘에서 눈송이들이 끝없이 내려왔다. 딸이 두 팔을 벌렸다. 눈이 딸의 외투 위에, 머리 위에, 벌린 손 위에 내려앉았다. 영화의 그 장면을 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딸의 폰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딸은 일어나서 확인하더니 다시 누웠다. 조금씩 다른 자세로 몇 번이고 그렇게 눈밭에 누웠다. 아내도 웃으며 찍어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좋았다. 그런데 그 좋은 마음 옆에 걱정이 따라다녔다. 저렇게 누우면 등이 다 젖을 텐데. 내려가는 길에 추울 텐데. 하산 열차가 몇 시였지.
그냥 그런 사소한 불안이었다.
내려갈 시간이 되자 눈이 그쳤다. 서서히 구름이 사라졌다. 마치 어둠의 장막이 걷히듯. 산정상은 설원인데 멀리 보이는 루체른은 여전히 봄날 같았다. 산 위에는 겨울이, 산 아래에는 봄이 있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나도 열차 시간을 잊고 그냥 보았다.
가족사진을 찍고 하산 열차에 올랐다.
열차 안에서 딸이 말했다.
"아빠."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내 폰이 없어."
아, 또 여기서 이런 일이.
눈밭에 누우면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다시 올라갈 수도 없었다. 다음 일정이 있었고, 열차 시간도 맞춰야 했다.
딸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속에 내가 찍은 사진들이 다 담겨 있는데."
아내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 아내와 딸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괜찮아. 오래된 폰이잖아. 돌아가면 아빠가 갖고 싶은 폰 사줄게. 사진은 또 찍으면 되지. 우리가 네 사진 많이 찍었으니까, 다 보내줄게."
그리고 아내를 보며 덧붙였다.
"그렇지."
속으로는 벌써 걱정하고 있었다. 이 침묵을 어떻게 풀어낼까.
아내의 눈길이 딸에게로 갔다. 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길게 쉬고, 젖은 곳을 닦으라고 수건을 건네주었다.
내려오는 열차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는 아까의 그 봄이 놓여 있었다. 사진을 찍지 않았다.
열차 안의 냉기는 그날 저녁 식탁에 가서야 누그러졌다. 누가 먼저 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딸이 이제는 아무리 멋진 장면이 나타나도 눈밭에는 눕지 않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을 때, 아내가 포크를 내려놓고 웃었다.
오늘 새 폰이 도착한다. 눈밭에서 사진을 찍던 아이는 촬영 스태프로 나갈 만큼 사진을 좋아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일로 서로에게 상처를 더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날 눈밭에서 잃어버린 것은 휴대폰 하나면 충분했다.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까지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택배가 도착하면 딸에게 이번에는 잘 되는지, 이제 괜찮은지부터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