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우리는 어떻게 몸의 지혜를 잃어버렸는가

by이호창

1-4.5. 우리는 어떻게 몸의 지혜를 잃어버렸는가



우리의 몸은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니라, 우주의 비밀을 품고 신성한 에너지가 머무는 살아있는 성전 (聖殿)임을 이야기했습니다. 몸의 감각에 귀 기울이고 그 신호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온전함을 회복하고 ‘합일의 경지’ 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토록 놀라운 지혜와 신성함을 품고 있는 몸과 우리는 왜 이토록 멀어졌을까요? 왜 우리는 몸이 보내는 소중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때로는 몸을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게 되었을까요? 마치 보물 지도를 손에 쥐고도 읽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우리는 어쩌다가 우리 존재의 가장 확실한 안내자인 몸의 지혜를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되짚어보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금 왜 고통받고 방황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하고 다시 온전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몸의 지혜를 잃어버린 과정은 어느 한순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이루어졌습니다.


생각하는 마음의 등불 아래, 가려진 몸의 그림자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생각하는 마음’, 즉 고도로 발달한 지성 (知性)입니다. 이 능력 덕분에 인류는 언어를 만들고, 도구를 사용하며,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복잡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생각하는 마음’은 어둠 속을 밝히는 등불처럼 우리를 이끌었고, 생존과 번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듯, 이 강력한 지성의 발달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우리는 점차 생각하는 ‘나’와 생각의 대상이 되는 ‘몸’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주체’가 되고, 몸은 마음이 부리고 통제해야 하는 ‘객체’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순수하고 고결한 정신과 달리, 몸은 끊임없이 변하고 유한하며, 때로는 불편한 욕망이나 감정을 일으키는 ‘낮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문화와 철학, 종교 속에서 강화되었습니다. 특히 서양 사상사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예를 들어,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거를 ‘생각하는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정신 (사유하는 실체, res cogitans)과 육체 (연장된 실체, res extensa)를 명확히 구분하는 심신 이원론 (心身二元論) 을 확립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정신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반면, 육체는 단순히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철학은 서양 근대 과학과 사상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몸을 정신과 분리된, 단순히 물질적인 기계로 보는 시각은 과학적 탐구의 길을 열었지만, 동시에 몸이 가진 내재적인 지혜나 주체성을 간과하게 만들었습니다. 몸은 더 이상 살아있는 지혜의 원천이 아니라, 분석하고 해부하며, 고장 나면 수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결과, 몸이 보내는 감각적인 경험이나 직관, 감정 등은 주관적이고 불확실하며, 때로는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불순물'처럼 취급되기 쉬웠습니다. 오직 명석하고 객관적인 이성 (理性)만이 진리에 도달하는 확실한 길로 여겨졌고, 몸의 언어는 점점 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중심은 생각하는 머릿속에 위치하게 되었고, 몸은 마치 내가 타고 다니는 마차나 소유물처럼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몸을 정신보다 열등하고 단순히 조작하거나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강화되면서, 우리는 몸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자연스러운 지혜와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몸에 대한 불신과 정신의 우위 사상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안에 존재하는 금욕주의 (禁慾主義) 전통 속에서도 그 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종교들 전체를 금욕주의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분파와 역사 속에서 육체는 종종 영혼을 더럽히는 죄의 근원이나 유혹의 온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육체적인 욕망, 특히 성적인 욕구는 영혼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엄격하게 통제되거나 억압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구원이나 신과의 합일은 종종 육체적인 삶을 초월하거나, 금식, 고행, 독신 등의 실천을 통해 육체를 ‘단련’하고 ‘정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믿어졌습니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몸은 영적인 성장을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극복하거나 벗어나야 할 장애물처럼 취급되기 쉬웠습니다. 몸이 주는 즐거움이나 본능적인 지혜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신성한 계시나 경전의 말씀, 혹은 이성적인 신학 논증이 몸의 직접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주요 철학 및 종교는 몸을 불신하고 정신 (혹은 영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 지성이 발달하면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몸과 마음의 분리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우리는 몸이 보내는 미묘한 직관이나 감각적인 지혜를 신뢰하기보다, 머리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길들여졌습니다. 몸이 피곤하다고 신호를 보내도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배우고, 슬롯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몸을 맞추지 못할 때 죄바카라감을 느꼈습니다. 몸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생각하는 마음의 목소리 (혹은 외부의 권위 있는 목소리)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안내자처럼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자 지혜의 보고 (寶庫)인 몸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몸 안에 깃든 자연스러운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외부의 목소리에 길들여진 내면의 속삭임


생각하는 마음이 몸과의 분리를 시작했다면, 슬롯적인 환경과 교육은 그 분리를 더욱 깊게 만들고 공고히 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슬롯와 문화라는 거대한 구조 속으로 던져집니다. 그 슬롯는 우리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암묵적인 규칙과 명시적인 기대치를 끊임없이 부여합니다. 우리는 가족, 학교, 친구 집단, 그리고 오늘날에는 더욱 강력해진 미디어를 통해 이러한 슬롯적 규범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내면화하며 성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몸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고유한 감각이나 감정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판단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는 이러한 과정을 권력의 관점에서 날카롭게 분석했습니다. 그는 근대 슬롯의 다양한 기관들 –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 –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 권력' (discipline)을 통해 개인의 몸을 길들이고 통제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규율은 폭력적인 억압보다는, 시간표, 정해진 자세, 반복 훈련, 끊임없는 감시와 평가와 같은 미세한 방식들을 통해 작동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개인의 몸은 슬롯가 요구하는 특정한 방식에 따라 움직이고 느끼도록 훈련되며, 결국 슬롯적으로 유용하고 순응적인 '길들여진 몸' (corps dociles)이 됩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는 정해진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도록 훈련받고, 슬롯에서는 남자아이는 슬퍼도 울음을 참고 강인함을 보여야 한다고, 여자아이는 분노를 표현하기보다 상냥하고 부드러워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가르칩니다. 이러한 규율 속에서 몸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나 충동은 억제되고, 슬롯적으로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행동 양식만이 내면화됩니다. 몸의 지혜는 이러한 슬롯적 길들이기 과정 속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슬롯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1930-2002) 역시 '아비투스' (habitus)라는 개념을 통해 슬롯 구조가 어떻게 개인의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아비투스는 개인이 속한 슬롯 계층이나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체득된 성향, 즉 ‘제2의 천성’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말투, 몸짓, 자세, 취향, 심지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까지 포함합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슬롯적으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먹고, 앉고, 걷고, 말하도록 배웁니다. 예를 들어, 특정 슬롯에서는 식사 중에 소리를 내는 것을 무례하다고 여기고, 어떤 자세는 ‘단정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아비투스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슬롯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슬롯적으로 학습된 몸의 방식들은 종종 몸이 보내는 본래적인 신호나 편안함보다 우선시됩니다. 우리는 슬롯가 규정한 ‘이상적인 몸매’에 자신의 몸을 맞추려 애쓰고, 그렇지 못할 때 수치심이나 죄바카라감을 느낍니다. 배고픔이나 피곤함 같은 몸의 기본적인 신호조차도, 일이나 학업 성과 같은 외부적인 목표, 혹은 슬롯적인 시선 때문에 무시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 속에서, 정작 내 몸이 지금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점점 더 무감각해집니다.

나아가 우리는 건강이나 질병에 대한 문제조차 자신의 몸이 보내는 내밀한 신호에 귀 기울이기보다, 외부 전문가인 의사나 약사의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전문가의 지식과 도움은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외부 권위에 대한 의존이 심화되면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몸 상태를 느끼고 판단하며 돌보는 내재적인 능력을 점점 더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자동차 계기판의 숫자와 경고등에만 의존하느라 엔진 소리의 미묘한 변화나 차체의 떨림을 감지하지 못하는 운전자처럼, 우리는 외부의 진단과 처방에만 의존한 나머지, 우리 몸이 보내는 가장 직접적이고 정확한 내면의 정보들을 놓치거나 무시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몸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외부의 목소리와 슬롯적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슬롯적 조건화 속에서 몸의 지혜는 더 이상 신뢰할 만한 내면의 안내자가 아니라, 통제하고 교정해야 할 미숙한 대상, 혹은 외부 기준에 맞춰 끊임없이 평가받고 관리되어야 하는 객체로 전락합니다. 몸이 보내는 섬세한 속삭임은 슬롯의 커다란 확성기 소리와 외부의 권위 있는 목소리에 묻혀버리고, 우리는 점차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몸과의 연결이 끊어진 채,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온전함과 건강을 누리기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감각, 다시 찾는 길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의 우위와 슬롯적 조건화로 인해 시작된 몸과의 분리는, 현대 슬롯의 특징적인 생활 방식 속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자극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은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정보의 홍수는 우리의 마음을 쉴 틈 없이 분주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점점 더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대신, 머리로 생각하고 분석하며 가상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몸을 움직여 땀 흘리는 시간은 줄어들고, 앉아서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우리를 몸의 감각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미묘한 몸의 변화나 에너지의 흐름을 감지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둔감해집니다. 몸이 보내는 불편함이나 고통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병이 깊어진 뒤에야 알아채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는 스트레스나 감정적인 어려움을 느낄 때, 그 원인을 깊이 탐구하고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종종 더 자극적인 음식, 술, 쇼핑, 혹은 오락거리로 그 감각을 덮어버리려 합니다. 이는 순간적인 위안을 줄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만듭니다. 우리는 몸의 지혜를 외면하고, 감각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더욱 깊은 고립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우리가 몸의 지혜를 잃어버린 것은 우리의 본성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것을 무시하고 다른 것에 주의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다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쌓인 악기처럼, 우리가 다시 주의를 기울이고 조율하기 시작하면, 몸은 다시 아름다운 음악, 즉 생명의 지혜를 연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요가와 탄트라는 바로 이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하고, 몸의 지혜를 다시 깨우는 구체적인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요가는 아사나와 프라나야마, 그리고 명상을 통해 우리가 다시 몸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호흡 속에서 생명의 흐름을 느끼며, 생각의 소음 너머에 있는 고요함과 만나도록 돕습니다. 탄트라는 몸을 신성한 에너지의 사원으로 여기고, 몸 안의 감각과 에너지를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활용하여 더 높은 의식 상태, 즉 ‘합일의 경지’ 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여정의 시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몸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가만히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입니다. 의자에 닿은 엉덩이의 감촉, 어깨의 긴장, 발바닥의 느낌, 그리고 가슴의 오르내림. 이 단순한 알아차림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몸과의 연결을 다시 회복하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몸의 지혜는 우리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다시 귀 기울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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