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 말은 하나의 관념으로서, 머리로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식으로서 이 명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나’의 고통을 가장 크게 느끼며, ‘나’의 가족과 ‘나’의 집단을 우선시합니다. ‘하나’라는 지식이 ‘하나’라는 삶이 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는 근본적인 모순입니다.
우리가 ‘나’라는 분리된 감옥 안에 갇혀있는 한, ‘하나됨’은 아름다운 구호나 종교적 신념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질적인 고통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세상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한다는 그 근원적인 외로움은 ‘하나’라는 지식을 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처럼 머리와 가슴이 분리된 상태를 끝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영역을 넘어선 ‘체험’의 영역입니다. 이것은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 (Knowing)이 아니라, 내가 곧 ‘하나’ 그 자체가 되는 것 (Being)입니다. 이것은 관념의 변화가 아니라 ‘인식의 혁명’입니다. 이 혁명은 ‘나’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요가 (Yoga)와 탄트라 (Tantra)는 이 혁명을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두 개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분리의 뿌리를 관찰하는 길: 요가
우리는 어떻게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을 잃어버렸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쉴 새 없이 세상을 나누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나’와 ‘나 아닌 것’, ‘좋음’과 ‘나쁨’, ‘과거’와 ‘미래’로 경계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마음의 활동, 즉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나’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는 감옥의 실체입니다.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을 회복하는 첫 번째 길은, 이 감옥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요가의 지혜는 이 소란스러운 마음의 작용을 멈추는 명확한 기술을 제시합니다. 위대한 현자 빠딴잘리 (Patañjali)는 그의 『요가 수트라, Yoga Sūtra』에서 “요가는 마음의 작용을 멈추는 것 (Yogaś-citta-vṛtti-nirodhaḥ, 요가스 칫따 브릿띠 니로다하)”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생각을 억지로 누르거나 제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의 파도를 그저 ‘바라보는’ 연습입니다. 우리는 이 수행을 통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감정이 나를 스쳐 지나가고 있음’을 봅니다.
이 고요한 관찰 속에서,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나’라고 믿었던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폭풍우 치는 파도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거대한 ‘바다’의 고요함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합니다.
‘나’라는 파도가 가라앉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다’라는 본래의 바탕과 만납니다. ‘나’와 ‘너’를 나누던 경계선은 본래부터 실체가 없었으며, 단지 ‘생각’이라는 파도가 만들어낸 물거품에 불과했음을 깨닫습니다. ‘나’라고 불렀던 작은 존재가 사실은 거대한 ‘하나의 의식’과 분리된 적이 없었음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가 이끄는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의 회복입니다.
모든 것을 껴안아 하나가 되는 길: 탄트라
요가가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혀 본래의 바다를 드러내는 길이라면, 탄트라는 그 파도의 힘 자체를 타고 넘어 바다 전체와 하나가 되는 대담한 길입니다. 탄트라는 우리가 ‘분리’를 위해 사용했던 에너지까지도 근원적인 하나의 표현임을 꿰뚫어 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분류하고 억눌러왔던 것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그 모든 강력한 에너지, 즉 분노, 두려움, 질투, 그리고 가장 강렬한 성적 욕망까지도, 본래는 ‘신성한 힘 (Śakti, 샤크티)’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뿐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길에서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은, 모든 것을 억누르고 텅 빈 고요함 속에 머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 그 가장 격렬한 에너지의 춤까지도 남김없이 껴안는 것입니다. 탄트라 수행자는 ‘나’와 ‘너’를 나누는 경계선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경계선 자체를 ‘신성한 만남의 장소’로 변화시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신의 현현으로 바라볼 때, 분리의 감옥은 저절로 녹아내립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저 사람조차도, 모든 존재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나타난 존재임을 봅니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저 대상 역시, 신성한 실재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것임을 봅니다.
이 길에서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신성한 실재가 추는 거대한 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탄트라는 이 춤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몸 (소우주) 안에 잠들어 있는 우주적 에너지 (Kuṇḍalinī, 쿤달리니)를 깨워, 그것을 순수한 의식 (Śiva, 시바)과 합일시킵니다. 이 합일의 체험을 통해, ‘나’라는 작은 의식은 우주 전체의 의식과 하나가 됩니다. ‘나’의 몸은 이 ‘합일의 상태’가 깨어나는 신성한 신전이 됩니다.
삶이 곧 ‘합일의 경지’가 되는 순간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일상이 송두리째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산속의 명상굴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신비 체험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극히 구체적인 ‘삶’ 그 자체입니다.
이 감각이 회복될 때,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있던 벽이 허물어집니다. 타인의 아픔이 더 이상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 몸의 다른 부분이 아픈 것처럼, 즉각적이고도 구체적인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의무감이나 도덕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진정한 ‘자비 (慈悲, Karuṇā, 카루나)’입니다. 자비는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 감각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바람이 내 피부를 스칠 때, 그것은 ‘바깥의 바람’이 ‘나’를 스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대한 전체성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순환을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들이마시는 이 숨결은, 저 숲속의 나무가 내쉰 숨결과 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주 전체와 생명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외부의 물질’을 ‘내’가 섭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생명이 스스로의 형태를 바꾸어, 또 다른 표현 (나)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신성한 과정입니다. 식사하는 행위 자체가 우주적 합일의 명상이 됩니다.
‘합일의 경지’라는 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나’라는 작은 존재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나’라고 한정 지었던 좁은 울타리가 무너지고, ‘나’라는 존재가 온 우주만큼 거대하게 확장되는, 가장 경이롭고 완전한 해방입니다.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와, 본래부터 우리의 집이었던 이 거대한 전체성 안에서 자유롭게 숨 쉬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