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by이호창

1-2.4.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전부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감 (五感)을 통해 이 세계를 경험합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단단한 사물,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뚜렷한 색채, 그리고 ‘나’와 명확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저 바깥의 풍경. 이 감각적인 경험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즉각적이어서, 우리는 이것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현실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깥의’ (exoteric) 세계입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동의하는, 현상의 세계입니다.

이 견고한 믿음 위에서 ‘나’라는 감옥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은 절대로 합쳐질 수 없는 두 개의 실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 물질 세계 안에서 ‘나’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분투하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곧 존재의 확장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과학을 발전시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이 포착하는 이 세계가 과연 실재의 전부일까요?

우리의 눈은 전자기 스펙트럼의 극히 일부인 ‘가시광선’만을 봅니다. 우리는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보지 못하며, 온갖 종류의 전파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을 통과하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귀는 특정 주파수 대역의 소리만을 듣습니다. 우리가 ‘고요함’이라고 부르는 순간에도, 세상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단단하다’고 만지는 이 탁자조차, 더 깊이 들여다보면 텅 빈 공간 속을 무서운 속도로 진동하는 에너지의 집합일 뿐입니다. 현대 물리학조차도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물질 세계가 사실은 견고한 실체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거짓’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수면 아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본체가 숨어 있습니다. 이 수면 아래의 영역, 즉 감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지만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을 낳고 움직이는 근원적인 차원. 이곳이 바로 ‘안쪽의’ (esoteric), 즉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는 저 멀리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천국이나 명계 (冥界)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가 경험하는 이 가시적인 세계의 ‘안쪽’이며 ‘바탕’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결과’라면, 보이지 않는 세계는 ‘원인’의 영역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현상’이라면, 보이지 않는 세계는 그 현상을 일으키는 ‘에너지’와 그것을 지켜보는 ‘의식’의 영역입니다.

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중 구조 역시, 우리 몸 안에 그대로 존재합니다. 우리에겐 눈에 보이는 ‘육체’가 있습니다. 이것은 살과 뼈와 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질 수 있고, 늙고 병들어 갑니다. 이것이 우리 몸의 ‘보이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대의 지혜, 특히 요가와 탄트라는 우리에게 이 육체와 겹쳐져 있는 또 하나의 몸, 즉 ‘보이지 않는 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눈으로는 볼 수 없고, 해부용 칼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닌 ‘에너지’로 이루어진 몸입니다. 힌두 철학에서는 이것을 ‘프라나마야 코샤 (Prāṇamaya Kośa)’, 즉 ‘생명 에너지의 집’이라고 불렀으며, 때로는 ‘미묘신 (微妙身, Sūkṣma Śarīra, 숙슈마 샤리라)’이라고도 합니다.

‘요가’ 수행은 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우리가 왜 명상을 하고 호흡을 바라볼까요? 그것은 ‘보이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던 감각의 문을 잠시 닫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평소에 눈앞의 현상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외부의 자극들이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듭니다. 요가는 이 소란스러운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히는 기술입니다. ‘프라나야마 (Prāṇāyāma)’라는 호흡 수행은 특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숨’을 쉰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들이마시는 것은 공기라는 물질 (보이는 세계)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공기 속에 담긴 우주적 생명 에너지,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의 ‘프라나 (Prāṇa)’를 들이마십니다.

요가 수행자는 호흡을 통해 이 ‘프라나’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단지 공기의 드나듦으로 느껴지지만, 수행이 깊어지면 몸 안에서 전기가 흐르는 듯한 미묘한 에너지의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의 한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첫걸음입니다. 수행자는 더 이상 ‘생각’하는 대신,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탄트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체적인 지도를 제시합니다. 요가가 문을 열어주었다면, 탄트라는 그 문 너머의 세계를 탐험하는 항해술입니다.

탄트라는 이 ‘보이지 않는 몸’ 안에 수만 개의 에너지 통로인 ‘나디 (Nāḍī)’가 그물처럼 펼쳐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신경계나 혈관과는 다른 차원의 통로입니다. 그리고 이 나디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지점들에 강력한 에너지의 소용돌이, 즉 ‘차크라 (Cakra)’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차크라는 우리가 수술로 열어볼 수 있는 물리적인 장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몸’에 속한 에너지의 중심점입니다. 이 차크라들은 우리 의식의 여러 차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척추 밑바닥의 가장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에서부터, 정수리의 가장 순수하고 초월적인 의식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차크라는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의식’을 연결하는 무지개다리입니다.

탄트라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지도를 이용하여, ‘보이는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탄트라는 우리가 그토록 경시했던 이 육체 (보이는 세계)가, 사실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장 강력한 잠재력, 즉 ‘쿤달리니 (Kuṇḍalinī)’라는 우주적 에너지를 품고 있는 신전임을 간파했습니다. 탄트라의 수행은, 요가를 통해 정화된 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이 잠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불’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이 ‘나디’라는 보이지 않는 통로를 타고 ‘차크라’라는 보이지 않는 문들을 통과하여, 마침내 ‘시바 (Śiva)’라는 순수한 ‘보이지 않는 의식’과 합일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적 합일’의 실제 과정입니다. 합일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이는 나’와 ‘보이는 세계’라는 분리의 환상이 깨지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보이지 않는 의식’이라는 ‘하나의 실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체험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두 개의 다른 장소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의 뿌리이며,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마치 얼음 (보이는 세계)과 수증기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본질적으로는 같은 물 (H₂O)인 것과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봅니다. 그는 눈앞의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육체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깃든 신성한 의식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봅니다. 그는 이 세상을 ‘나’와 분리된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의 생명’이 ‘보이는 모습’으로 끝없이 춤추고 있는 경이로운 무대로 바라봅니다.

‘나’라는 감옥은, 우리가 오직 ‘보이는 세계’만이 실재라고 믿을 때에만 견고하게 유지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재를 체험하는 순간, 감옥의 벽은 본래부터 틈이 가득한, 투명한 막이었음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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