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4. 노리치의 줄리안 : 긍정의 신학

by이호창

3-12.4. 노리치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긍정의 신학



바깥세상이 흑사병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절망에 휩싸여 있을 때, 잉글랜드 동부 노리치의 성 줄리안 교회 담벼락에 붙은 비좁은 공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찬란하고 급진적인 희망의 신학이 탄생했습니다. 노리치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1342-1416)으로 알려진 이 여성은 스스로를 돌벽 속에 가두고 세상을 향해 단 하나의 작은 창문만을 열어둔 채, 은수처 (Anchorhold)에서 평생을 침묵과 기도에 전념하는 은수녀 (Anchoress)로 살았습니다.

그녀가 남긴 『신성한 사랑의 계시, Revelations of Divine Love』는 여성이 영어로 저술한 역사상 최초의 바카라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바카라은 고통과 죄의 문제를 신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탁월한 신학적 보고서입니다. 줄리안은 신의 진노를 두려워하던 당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분노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어머니처럼 돌보시는 분이라는 파격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녀가 선포한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낙관주의는 현실을 도피하는 낭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통과한 후에 얻어진 부활의 확신이었습니다.

줄리안의 영성은 그녀가 30세 되던 해인 1373년 5월에 겪은 임사 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중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며칠간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삼위일체의 신비에 관한 열여섯 번의 환시 (Showings)를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은 그녀의 육체적 질병을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적 시야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열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본 환상을 기록하고 그 의미를 평생에 걸쳐 묵상하며 신학적으로 정립했습니다.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개인적인 황홀경에 머물지 않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물음인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했습니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왜 세상에는 이토록 끔찍한 죄와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신정론 (Theodicy)적인 난제는 그녀가 평생 씨름했던 화두였습니다.

줄리안은 환상 중에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헤이즐넛 (Hazelnut) 크기의 물체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것은 창조된 모든 것"이라는 응답을 들었습니다. 우주 전체가 작은 열매처럼 연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였기에 그녀는 그것이 금방이라도 무으로 돌아가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작은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셋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것의 신비’는 줄리안에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주었습니다. 세상은 그 자체로는 덧없고 허무하지만 창조주의 사랑이 그것을 감싸고 있기에 결코 파괴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 또한 아무리 죄로 얼룩지고 연약할지라도 신의 사랑이라는 견고한 껍질 안에 보호받고 있기에 결코 소멸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줄리안 신학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죄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왜 죄를 허락하셨는지를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녀가 받은 계시는 "죄는 필연적이다 (Sin is behovely)"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필연적 (Behovely)'이라는 말은 죄가 긍정적인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의 섭리 안에서 유용한 목적을 위해 허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줄리안은 죄를 실체가 없는 것 즉 선의 결핍이나 비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무의미한 죄조차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인간은 죄를 통해 자신의 약함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죄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독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하는 쓴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줄리안은 죄로 인한 상처조차도 천국에서는 영광스러운 훈장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의 모성 (Motherhood of God)’이라는 혁명적인 신관으로 이어집니다. 줄리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교회 전통에서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창조주로서의 권능을 아버지의 속성으로 구속주로서의 지혜와 자비를 어머니의 속성으로 연결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참된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육신의 어머니는 젖을 먹여 아이를 기르지만 영혼의 어머니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기르십니다. 또한 어머니가 산통을 겪으며 생명을 낳듯이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의 극심한 고통을 통해 인류를 영적으로 낳으셨습니다. 줄리안은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를 우리가 들어가 쉴 수 있는 안전한 자궁이자 피난처로 묘사했습니다. 신의 사랑을 모성애로 해석한 그녀의 신학은 심판과 형벌에 대한 공포에 떨던 중세인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안식을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신의 모성적 사랑과 섭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줄리안의 영성을 흔들리지 않는 '낙관주의'로 이끌었습니다. 죄와 고통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을 방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는 그녀의 확신은 줄리안의 사상을 비관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독보적인 희망의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줄리안의 낙관주의는 현실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막연한 긍정이 아닙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것들이 다 잘 될 것이다 (All shall be well,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 shall be well)"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습니다. 이는 지금 당장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고 고통이 끝이 없어 보일지라도 역사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부조리를 바로잡고 선을 완성할 것이라는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그녀는 악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악까지도 선을 드러내는 배경이 될 것임을 믿었습니다. 이 "잘 됨 (Wellness)"은 인간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신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는 차원에서의 완성입니다.

줄리안은 은수처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우주 전체를 품을 만큼 넓었습니다. 그녀는 창문을 통해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상담을 해주며 그들의 고통을 듣고 위로했습니다. 그녀에게 은수처는 세상과 단절된 감옥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중보하고 신의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영적 발전소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체험을 특권화하지 않고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들 (Even-Christians)을 위한 보편적인 메시지로 여겼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계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신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밝혔습니다.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지성적인 사변보다는 체험적인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시는 것만큼 우리도 하나님을 원하는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신을 설득하여 무언가를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신의 의지와 조율되어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죄바카라감에 짓눌려 슬퍼하는 것보다 신의 자비를 믿고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노리치의 줄리안이 전하는 메시지는 불안과 혐오가 만연한 현대 슬롯에 강력한 치유제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고 타인의 잘못에 대해 가혹하게 비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줄리안은 우리의 연약함조차도 신의 사랑 안에서는 '필연적인 과정'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어머니이신 신의 품에 안겨 쉬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세상의 악과 고통 앞에서 절망하지 말고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신의 섭리를 신뢰하며 희망을 가지라고 호소합니다. 700년 전 흑사병의 공포 속에서 울려 퍼졌던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그녀의 음성은 막연한 주문이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을 관통해 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인 확신이자 우리 영혼을 지탱해 주는 단단한 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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