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6. 결국 ‘하나된 마음’을 보기 위한 수행

by이호창

4-16.6. 결국 ‘하나된 마음’을 보기 위한 수행



우리는 삶을 조각난 거울처럼 경험합니다. 깨어있는 낮의 시간과 의식을 잃는 밤의 시간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입니다. 살아있는 지금의 현실과 언젠가 닥쳐올 죽음의 순간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처럼 깨어있음과 잠,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이원성 (二元性)의 틀 안에서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분리된 조각들 중 하나, 즉 ‘깨어있는 낮의 삶’만을 ‘나’라고 착각하며, 그 안에서 집착하고 고통받습니다. 이 근본적인 분열과 착각이야말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윤회(Saṃsāra, 삼사라)의 뿌리입니다.

나로파 (Nāropa, 1016-1100)의 여섯 가지 가르침, 즉 ‘나로 최된 (Nā ro chos drug)’은 바로 이 모든 경계선을 허물고 파편화된 존재를 다시 하나로 꿰매기 위해 존재합니다. 툼모 (gtum mo), 환영의 몸 (sgyu lus, 규루), 꿈 (rmi lam, 밀람), 정광명 ('od gsal, 외셀), 바르도 (bardo), 그리고 포와('pho ba)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닦는 여섯 개의 분리된 수행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하나의 완결된 유기적인 시스템입니다. 그 목표는 낮과 밤, 삶과 죽음, 몸과 마음이라는 이원성의 모든 환영을 꿰뚫고, 그 모든 것의 바탕에 항상 흐르고 있는 ‘하나된 마음(One Mind)’의 본성을 직접 보고 그것과 합일 (合一)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된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금강승 (金剛乘, Vajrayāna, 바즈라야나)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바탕, 즉 정광명 (淨光明, Clear Light, 'od gsal, 외셀)입니다. 이 정광명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존재의 밑바탕에 항상 흐르고 있는 순수한 ‘앎 (Awareness, rigpa, 릭파)’ 그 자체입니다. 이 마음의 본성은 텅 비어 (空性, 슈냐따) 있습니다. 그 안에는 ‘나’라는 고정된 실체도, ‘너’라는 분리된 대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 (虛無)가 아닙니다. 그것은 ‘빛나고 (光明, 프라바스와라)’ 있습니다. 즉, 텅 비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아는 능력, 순수한 ‘지각 (Perception)’ 그 자체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근원적인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빛은 우리 존재의 모든 상태 속에 항상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ma rig pa, 마릭빠) 그 빛이 겉으로 드러내는 현상들에만 집착합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낮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하나된 마음’의 빛이 우리의 거친 육체와 감각기관을 통해 투영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빛이 잠자는 동안 우리의 미묘한 의식 속 습관 (習氣, 바사나)을 통해 투영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깊은 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현상이 잠시 근원으로 돌아가 그 빛 자체가 형상 없이 머무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 모든 거친 육체와 마음의 틀이 완전히 해체되고, 이 근원적인 빛이 본래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찰나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나로파의 여섯 가지 요가는 이 모든 파편화된 경험들이 사실은 ‘하나된 마음’이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다양한 표현임을 깨닫게 하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의 목적은 더 이상 이 조각난 경험들 중 어느 하나 (예: 깨어있는 삶)에만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수행은 낮의 의식, 꿈의 의식, 깊은 잠의 의식, 그리고 죽음의 의식이라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여 흐르는 하나의 연속적인 ‘앎 (정광명)’의 흐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천 년 전 스승들의 가르침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우리는 히말라야의 동굴 속에서 수행하는 요기 (Yogi)가 아닙니다. 우리는 스마트폰 알람에 눈을 뜨고,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일하며, 끊임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불안과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로파의 6법이 겨냥하는 근본적인 문제, 즉 ‘존재의 파편화’는 현대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졌습니다. 우리는 ‘온라인 게임에서의 나’와 ‘가정에서의 나’, ‘SNS 속의 나’와 ‘홀로 있을 때의 나’ 사이에서 분열됩니다. 우리는 성취를 향한 맹렬한 열정 (과도한 툼모의 불)과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극도의 무기력 (차가운 정광명) 사이를 오갑니다.

나로파의 6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하나된 마음’의 지혜는, 이처럼 분열된 현대인의 삶을 통합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실질적인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가르침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낮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환영의 몸 (sgyu lus, 규루)’과 ‘꿈의 요가 (rmi lam, 밀람)’의 핵심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이 우리 마음의 투영이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고통은 성공, 돈, 지위, 타인의 인정과 같은 외부의 현상들을 절대적인 ‘실체’라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온라인 게임에서의 실패가 ‘나’라는 존재의 완전한 실패라고 느끼며 절망합니다. SNS 속 타인의 화려한 삶 (환영)을 나의 초라한 현실과 비교하며 끝없는 결핍감에 시달립니다.

‘하나된 마음’의 관점은 이러한 집착이 ‘낮의 꿈’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됨을 꿰뚫어 봅니다. 이 지혜는 우리에게 세상을 버리고 도피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낮의 꿈속에서 더욱더 생생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이 ‘꿈’임을 잊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일하고 사랑하되, 그 결과가 마치 꿈속의 일처럼 영원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텅 비어있음을 압니다. 이 자각 속에서 우리는 결과에 대한 집착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비로소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두려움 없이 춤추는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온라인 게임에서의 성공이나 실패가 더 이상 ‘나’를 규정하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그저 ‘하나된 마음’이라는 거대한 하늘을 스쳐 지나가는 구름일 뿐임을 압니다. 이것이 바로 ‘환영의 몸’ 요가가 현대인에게 주는 진정한 해방입니다.

또한, 이 가르침은 우리의 격렬한 감정과 스트레스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종종 분노, 불안,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차가운 길), 혹은 그 감정에 휩쓸려 파괴적인 행동을 합니다 (뜨거운 길).

‘툼모 (gtum mo)’의 지혜는 이 두 가지 길을 모두 넘어섭니다. 툼모는 감정 그 자체가 순수한 에너지임을 가르칩니다. 분노나 불안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단지 ‘뜨거운’ 에너지일 뿐입니다. 툼모 수행은 이 에너지를 적으로 삼아 싸우거나 억누르는 대신, 그 에너지를 내면의 중심으로 가져와 ‘알아차림’의 불길로 변형시키는 법을 가르칩니다.

현대인이 극심한 스트레스나 분노를 느낄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일으킨 외부의 대상 (상사, 가족)이나 감정의 ‘이야기’ (“그가 나를 무시했어”)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하나된 마음’을 훈련하는 이는 그 순간 숨을 멈추고 안으로 돌아섭니다. 그는 이야기 대신, 가슴이 뛰고 배가 뜨거워지는 그 ‘에너지 자체’의 순수한 감각에 집중합니다. 그는 툼모의 불을 지피듯, 그 에너지를 혐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 순수한 알아차림의 빛 속에서, ‘분노’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던 에너지는 그 본래의 모습, 즉 ‘하나된 마음’의 생생한 활력 (Vitality)으로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에너지의 노예가 아니라, 그 에너지를 타고 깨어나는 연금술사가 됩니다.

더 나아가, 이 가르침은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삼분의 일, 즉 ‘잠’의 시간을 회복하게 합니다. 현대인은 ‘깨어있는’ 낮의 효율성만을 중시한 나머지, 잠을 단순히 육체를 재부팅하는 시간이나 낭비되는 시간으로 치부합니다. 우리는 낮 동안의 불안과 걱정을 그대로 안고 잠자리에 들며, 깊은 휴식에 들지 못하고 얕은 꿈속을 헤매다 지친 채 아침을 맞이합니다. ‘정광명 ('od gsal, 외셀)’과 ‘꿈의 요가 (rmi lam, 밀람)’는 이 잠의 시간이 사실은 우리 존재의 근원, 즉 ‘하나된 마음’을 만날 수 있는 가장 고요하고도 강력한 기회임을 일깨웁니다.

우리가 비록 수행자가 아닐지라도, 잠들기 직전의 그 경계의 순간에 이 가르침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나’라고 믿었던 모든 역할 (직원, 부모, 학생)과 모든 감정, 모든 걱정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나’가 죽음을 맞이하듯, 모든 것을 텅 빈 공성 속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적인 ‘내려놓음’은 우리를 깊은 잠, 즉 ‘잠의 정광명’ 속으로 편안하게 인도합니다. 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휴식과 재충전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잠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낭비하지 않고, 매일 밤 우리 존재의 근원인 ‘하나된 마음’의 바다에 잠겼다가 나오는 거룩한 의식으로 변형시킵니다.

마지막으로, 나로파의 6법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두려움인 ‘끝’, 즉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죽음뿐만 아니라, 관계의 끝, 온라인 게임의 끝, 젊음의 끝과 같은 모든 종류의 ‘작은 죽음들’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이 끝들을 완전한 소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르도 (bar do)’와 ‘포와 ('pho ba)’의 가르침은 이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이 수행들은 우리에게 ‘나’라고 믿는 이 자아와 육체는 사라질지라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순수한 의식, 즉 ‘하나된 마음’의 정광명은 결코 죽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을 닦는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 유한하고 사라질 것들 (몸, 직업, 관계)에 두는 대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순수한 앎 (정광명)’에 두는 훈련을 평생에 걸쳐 하는 것입니다. 실직을 당했을 때, 우리는 ‘나는 끝났다’고 절망하는 대신, ‘나의 직업은 끝났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여전히 여기에 존재한다’고 자각합니다. 관계가 끝났을 때, ‘내 삶의 전부가 무너졌다’고 느끼는 대신, ‘사랑의 경험은 지나갔지만, 그 경험을 가능하게 했던 나의 근본적인 마음은 상처받지 않았다’고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와’, 즉 우리의 의식을 사라지는 현상에서 영원한 본성 (정광명 또는 아미타불의 정토)으로 ‘전이’시키는 현대적인 실천입니다.

결국 나로파의 여섯 가지 요가는 티벳의 고대 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낮의 집착, 격렬한 감정의 폭풍, 무의식적인 잠,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파편화된 우리 존재의 모든 조각들을 하나로 꿰뚫는 위대한 실천 철학입니다. 이 모든 수행은 결국 ‘하나된 마음’의 빛나는 진실을 보기 위함입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삶과 죽음, 깨어있음과 잠, 자아와 세계라는 모든 이원성의 경계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다만 ‘하나된 마음’, 즉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비추는 저 무한한 정광명의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파도일 뿐임을, 온 존재로써 체득하게 됩니다. 이 자각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분열된 현대인의 고통에서 벗어나, 온전하고 자유로우며 자비로운 존재로서 다시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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