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Ⅴ. 임윤찬의 슈베르트와 스크리아빈

'가장 작은 소리가 가장 큰 음악이 되는 순간'

by조윤미

유난히도 싱그럽고 햇살 좋은 오후였다.


“다별아, 엄마 다녀올게. 냉장고에 딸기 있으니까 꺼내먹고, 학교 다녀오면 손이랑 얼굴 꼭 씻기.”


메모를 남기고 현관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엄마!”


저 멀리서 병아리처럼 달려오는 딸아이가 와락 품에 안겼다.

잔뜩 상기된 얼굴. 따뜻한 체온. 들떠서 반가운 얼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여기서 시간이 잠시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네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네가 너답게 자라 갈 수 있도록, 내가 잘 지켜줄 수 있다면.’


그 마음을 뒤로한 채 서둘러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솔로 리사이틀이 있는 날이다.

프로그램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과 스크리아빈 피아노 소나타 2번, 3번, 4번.

특히 최근 슈베르트에 대한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해석은 평론가들과 대중 사이에서도 의견이 꽤 엇갈리고 있었다.


‘직접 들어봐야 알겠지.’


하지만 그날 내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었다.

나는 음악 앞에서 한 인간의 순수한 영혼을 보게 되었다.


(2026.5.12. 임윤찬 피아니스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오후 7시 30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 1악장이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첫 시작부터 템포는 과감했고, 프레이즈는 놀라울 만큼 명료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리의 섬세함이었다.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1악장부터 우나 코다 페달(una corda, 왼쪽 소프트 페달)

을 자주 사용하며 소리를 극도로 섬세하게 다듬고 있었다.

홀의 큰 울림 속에서도 음 하나하나를 흐리지 않으려는 듯했다.

특히 귀를 붙잡았던 것은 포르타토 터치였다.

음을 완전히 끊지도, 그렇다고 낭만적으로 길게 이어 붙이지도 않는 그 미묘한 호흡.

그는 악보 안에 숨어 있는 구조를 아주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포르타토는 바로크와 고전주의 작품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터치다.

그래서인지 그의 슈베르트에는 과장된 감정보다 절제된 선명함이 먼저 살아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견고한 구조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너무도 여리고 순수했다.

마치 슈베르트의 내면이 거울처럼 그대로 비쳐 나오는 듯했다.

꾸밈없이 투명한 소리.


‘아... 오늘 임윤찬은 슈베르트를 이렇게 끌고 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시간이 느려졌다.

1악장에 등장한 ‘un poco più lento’

바로 그 순간이었다.

1악장 악1.png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un poco più lento에 들어서자 첫 악센트인 ‘솔’의 울림을 유난히 깊게 남겼다.

그는 단지 그 음을 강하게 친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하나의 메아리가 홀 안을 천천히 떠다니도록, 그 잔향의 끝까지 붙들고 있는 듯했다.

순간, 음악의 시간이 달라졌다.

앞으로 나아가던 흐름은 잠시 멈추었고, 그 자리에 어떤 기억의 그림자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꼭 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서서, 오래 잊고 있던 무언가를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 같았다.

이 악센트는 베토벤적인 의미의 ‘의지적 돌진’과는 전혀 달랐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멈칫하게 만드는 울림에 가까웠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렇게 깊은 감정이 흐르고 있는데도 음악의 구조선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단단하고 투명한 구조 안에서, 임윤찬 피아니스트만의 아주 여린 소리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여기서 리듬을 미세하게 늦추고, 음과 음 사이에 깊은 침묵을 남겼다.

하지만 그것은 쇼팽식 루바토의 감정적 확장도, 리스트식의 극적인 과장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끝까지 절제된 표면을 유지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그 차가울 만큼 투명한 절제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슈베르트 다운 내면의 고독과 흔들림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악센트의 숨결은 2악장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이번에는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절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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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악장 악.png

사실 나는 유튜브 생방송에서 이 2악장의 첫 선율을 슈베르트 가곡의 정서와 연결해 설명했었다.

그런데 실제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나니, 오히려 1악장에서 스쳐 지나갔던 그 악센트의 리듬이 2악장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 느껴졌다.

반복되는 악센트는 음악을 앞으로 밀어가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끝내 베토벤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베토벤이 마치 “나는 간다”라고 외치며 운명 앞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이라면,

슈베르트는 그 순간에도 문득 뒤를 돌아보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 그것이 두 작곡가의 가장 큰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베토벤의 음악이 의지와 돌파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슈베르트의 음악은 자꾸만 기억과 내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리듬은 단순한 반복으로 들리지 않는다.

어떤 악센트와 호흡은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감정처럼 다시 돌아온다.

마치 마음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예상치 못한 순간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바로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연주는 구조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단단하고 투명했지만, 그 안에서 들려오는 정서는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구조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단단하고 투명했지만, 그 안에서 들려오는 정서는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연주가 끝난 뒤에도 내 안에는 한동안, 설명할 수 없는 슈베르트의 고독과 잔향만이 조용히 남아 있었던 이유가 거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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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악장과 4악장을 들었을 때 첫인상은 모두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움직임의 성격은 서로 달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셋잇단음의 리듬이 단순한 반주 패턴이 아니라 곡 전체의 추진력과 심리적 에너지를 이어주는 하나의 노래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였을까.

4악장이 시작되자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첫 리듬을 밀어내기 시작하는데, 나도 모르게 내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리듬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스스로도 이상했다.

‘어머! 내가 지금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네?’

의식적으로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음악에 반응하고 있었다.

특히 셋잇단음의 흐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도 전혀 딱딱하지 않았다.

마치 물결처럼 부드럽게 이어졌고, 그 리듬 안으로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움직임 안에는 단순한 밝음만 있지 않았다.

분명 음악은 달려가고 있는데,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과 슈베르트 특유의 고독이 함께 스며 있었다.

그래서 더 묘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음악을 분석하기보다, 그냥 그 리듬 안에서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다시, 1악장에서 느꼈던 그 인상이 떠올랐다.

견고한 구조 속에서 들려오던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너무도 순수했고, 어떤 순간에는 음악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는 것.

꾸며내지 않은 소리.

억지로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는 투명함.

그래서 더 쉽게 흔들리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게 되는 음악.

아마 나는 그날, 그런 순수함이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아주 작은 불빛 하나가 꺼지지 않도록 조용히 감싸 쥐듯이.


그런 순수함이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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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리아빈 피아노 소나타 2번, 3번, 4번의 연주>

반면 스크리아빈에 들어서는 순간, 공연장의 온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슈베르트 안에서 시간의 흔들림과 고독을 들려주던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스크리아빈에 이르자 전혀 다른 에너지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2번 소나타 첫 음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분위기가 달라졌다.

손끝에서는 마치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고, 음악은 더 이상 조용히 안으로 침잠하지 않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연주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슈베르트에서는 성부 사이의 균형과 구조적 투명성을 아주 섬세하게 세워가며 연주했다면, 스크리아빈에서는 음향의 흐름과 색채 자체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몸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슈베르트에서의 움직임이 정교하게 조각된 선처럼 느껴졌다면, 스크리아빈에서는 팔 전체의 무게와 회전이 훨씬 자유롭고 유동적으로 흘러갔다.

특히 2번에서 3번 1악장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숨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음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분리하기보다, 긴 선율 안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느낌.

그래서 음악이 단순히 ‘연주된다’기보다, 거대한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듯 들렸다.


‘연주된다’기보다, 거대한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듯 들렸다.


페달 사용도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소리를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음향 자체를 확장시키고 공간 안에 잔향의 층을 만드는 방식에 가까웠다.

특히 4번 소나타로 넘어가면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색채가 펼쳐졌다.

여기서는 단순히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빛의 방향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한 음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음의 잔향이 이미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우나코다와 미세한 페달의 조절은 몽환적인 안개 같은 음색을 만들어냈다.

특히 고음부에서는 정말 신기한 순간들이 많았다.

건반을 누른다기보다, 공기 위에 빛을 흩뿌리는 듯한 터치.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실제 소리보다 잔향과 분위기가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확실히 그것은 슈베르트를 연주할 때와는 전혀 다른 신체의 온도였다.

슈베르트가 기억과 고독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음악이었다면, 스크리아빈은 끝없이 타오르며 자기 안의 세계를 폭발시키는 음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그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한 사람의 몸과 손끝 안에서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연결해내고 있었다.


스크리아빈 4번 2악장 클라이막스 해설.png


내가 좋아하는 스크리아빈 피아노 소나타 4번 2악장.

악보 위에는 fff.

하지만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그것을 단순히 ‘아주 큰 소리’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의 소리는 거칠게 폭발하기보다, 수많은 울림이 겹겹이 쌓이며 거대한 빛의 덩어리처럼 밀려왔다.

그래서 더 압도적이었다.

보통 극한의 다이내믹에서는 소리의 파편이 튀거나 음향이 거칠어지기 쉬운데,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끝까지 그 소리의 마지막 한음을 놓지 않았다.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끝까지 그 소리의 마지막 한음을 놓지 않았다.


마치 피아노 한 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가 홀 전체를 감싸는 듯한 느낌.

특히 고음부의 찬란한 울림 위로 중저음의 두터운 에너지가 계속 겹쳐지면서, 음악은 단순한 클라이맥스를 넘어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문득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스크리아빈이 음악을 통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빛’과 ‘황홀’, 그리고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의 상태를 꿈꾸었는지를.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그 강렬한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도, 놀랍게도 단 한순간도 소리를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폭발 이후 홀 안에 남겨진 침묵은 더욱 이상할 만큼 깊게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빛이 지나간 자리처럼.


마치 거대한 빛이 지나간 자리처럼.




<그다음은?>


이번 주 토요일 밤 9시,

이 글에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그 전율을 유튜브 라이브에서 음악으로 함께 풀어보려 합니다.

여러분의 크레셴도가 되는 시간에 다시 만나겠습니다.

일시: 2026년 5월 16일 (토) 밤 9시

주제: ‘가장 작은 소리가 가장 큰 울림이 되는 순간’

채널: 유튜브 '조윤미의 크레셴도’

여러분의 인생이 크레셴도가 되는 그 결정적인 순간, 함께 공명하겠습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live/vqLBDcRiwVM?si=VFl9T8pxNahHti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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