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소설과 그 시체를 박제해 진열장에 세우는 소설, 그 차이는 어디서 갈리는가
역사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국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섬기는 일이다. 작가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공기를 성실히 복원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의 독자에게 가닿아야 한다는 모순된 임무를 함께 짊어진다. 이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소설은 생생한 인물 대신 박물관 전시물을 늘어놓는 데 그치고 만다.
시대극이 자주 걸려 넘어지는 지점은 의외로 뻔하다. 옛말투를 과하게 흉내 내거나, 애써 조사한 역사적 디테일을 하나도 버리지 못해 소설 전체를 자료집처럼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시대의 언어를 학자 수준으로 꿰뚫고 있으면서도 옛날 어법을 흉내 내는 대신 소박한 문장으로 시대의 결을 살려낼 수 있다는 것, 복잡한 수사 대신 단순한 언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좋은 역사소설은 보여준다.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리서치를 그대로 전시하려는 유혹이다. 도서관에서 몇 달을 보내며 찾아낸 사소한 사실 하나까지 지면에 욱여넣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정작 그런 디테일은 배경으로 낮게 깔려 있어야 독자가 정말 중요한 순간에 눈을 돌린다. 이는 마치 공들여 만든 대하사극이 인물의 내면보다 고증된 의복과 궁궐 세트를 보여주는 데 더 열중하다가 정작 사람의 이야기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등장인물을 관광 가이드로 쓰지 말라'는 원칙과도 이어진다. 정보 전달용으로만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인물, 혹은 시점 인물이 자기 시대에서는 너무 익숙해 오히려 눈에 띄지 않을 풍경을 굳이 세세히 관찰하게 만드는 실수. 이 모두는 결국 작가가 독자에게 정보를 주고 싶은 욕심이 인물의 자연스러운 시선을 앞질렀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역사소설 작가는 박물관 관리인도 고고학자도 아니다. 죽은 자를 그대로 일으켜 세우는 대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는 존재를 새로 소환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같은 유령을 두 번 똑같이 불러낼 수 없고, 그 유령의 목소리에서 결국 작가 자신의 목소리다 새어 나오는 것도 흠이 아니라 필연이다.
결국 좋은 역사소설이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되살리는 글이 아니라, 과거의 옷을 빌려 입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향해 말을 거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