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과 불가능 사이를 엿보는 일
확정하고 싶지 않은데 정보는 필요한 순간이 있다. 마음의 간을 보는 일, 슬쩍 물어보는 말들, 평가를 미룬 브레인스토밍. 양자역학의 약측정은 이 어중간한 행위에 정확히 대응한다. 결합을 약화시켜 파동함수를 거의 건드리지 않은 채로 정보만 얻는 방법이다. 2011년 Kocsis의 실험은 광자의 경로를 약측정으로 엿보면서도 간섭무늬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다만 이 정보는 한 번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반복해서 쌓이고, 나중의 결론과 함께 해석된다. 개와 늑대 사이, 그 붉은 시간에만 보이는 무늬가 있다.
이 글은 비전공자의 창의적 해석입니다. 본문에 포함된 양자역학 개념은 구조적 유사성에 근거한 재해석이며, 물리학적 엄밀성보다 실용적 이해를 목적으로 합니다.
AI 정보
확정하지 않고 정보만 얻을 수 있는가. 이 글은 그 질문을 약한 측정의 언어로 읽는 시도다.
2007년에 방영된 드라마 한 편의 제목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어에 그 시간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다고 한다. 빛과 어둠이 뒤섞이는 짧은 순간 —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이 안 되는 시간. 선도 악도 아직 같은 붉은빛에 뒤섞여 있는 시간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드라마는 제목 그대로였다. 복수를 꿈꾸며 자란 인물이 자신이 심판하려던 세계 안에서 성장해, 결국 그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이야기. 적과 아군의 경계가 극이 끝날 때까지 흐려진다. 확정을 미루는 서사가 아니라 — 확정 자체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자리에 인물을 세워둔 이야기였다.
이 제목이 오래 회자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결국 개와 늑대를 구분해 낸다. 그런데 구분되기 이전의 상태 그 자체를 제목으로 건 이야기는 드물다. 흐릿함을 결함으로 그리지 않고, 그 흐릿함 안에 뭔가 있다고 전제하는 제목.
이 글이 묻고 싶은 것도 비슷하다. 확정 이전의 상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태인가. 아니면 거기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따로 있는가.
무언가를 알고 싶은데 확정하고 싶지는 않은 순간들이 있다.
마음의 간을 본다. 이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닿을지, 관계가 앞으로 갈 만한지, 이 아이디어가 될 성싶은지 — 결론을 내리기 전에 슬쩍 확인하는 행위. 확인했다고 해서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니게 된다.
이 어중간함이 골치 아픈 이유는, 그것이 회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정을 미루는 사람으로 읽히기 쉽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회피가 아니라 — 다른 종류의 정보 습득이다. 강하게 확정 지으면 사라질 정보가 있고, 그 정보는 확정을 미룬 상태에서만 읽힌다.
확신을 갖고 빠르게 말하는 쪽이 더 유능해 보이는 것도 이 어중간함을 밀어내는 이유 중 하나다.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신뢰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그 확신이 실제로는 정보가 충분히 쌓이기 전에 나온, 성급한 결론일 때가 많다.
양자역학에는 이 어중간한 행위에 구조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이 있다. 강측정이 아니라 약측정. 표준적인 측정이 아니라, 결합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킨 측정.
Yakir Aharonov, David Albert, Lev Vaidman이 1988년에 제안한 개념이다. [1]
표준적인 양자측정 — 강측정 — 은 계와 측정 장치를 강하게 결합시킨다. 결과로 하나의 고윳값이 나오고, 파동함수는 그 고유상태로 붕괴한다. 정보를 얻는 대가로 중첩이 사라진다. 그 순간 이후의 모든 다른 가능성이 닫힌다. 무엇을 물었든, 물은 순간 하나만 남는다.
약측정은 이 결합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킨다. 계와 측정 장치의 상호작용을 최소화해서 — 정보를 아주 조금만, 노이즈에 가까울 만큼만 얻는다. 그 대신 파동함수는 거의 그대로 남는다. 중첩이 유지된 채로 정보가 새어 나온다. 완전한 답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
Aharonov, Albert, Vaidman은 여기서 더 나아갔다. 약측정을 전측정과 후측정 사이에 배치하면 — 측정값이 그 관측량의 고윳값 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스핀-1/2 입자의 스핀 성분이 100으로 측정되는 경우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이었다. 스핀은 원래 정해진 몇 개의 값만 가질 수 있는데, 그 범위 밖의 값이 나온다.
역설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데 이 역설이 말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무엇을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 같은 계에서 전혀 다른 정보가 나온다는 것. 강하게 물으면 정해진 값 중 하나. 약하게, 조건부로 물으면 상식을 벗어난 값. 둘 다 그 계에 대한 진실이라는 것이,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강측정과 약측정은 두 개의 딱 떨어지는 선택지가 아니다.
결합의 세기는 연속적인 값이다. 완전히 묻지 않는 것과, 완전히 확정 짓는 것 사이에 수많은 세기가 있다. 세기를 0에 가깝게 두면 정보도 거의 없고 파동함수도 거의 그대로다. 세기를 1에 가깝게 두면 정보는 확실해지고 파동함수는 완전히 붕괴한다. 그 사이 어딘가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삶에서도 이 다이얼이 존재한다. 질문 하나를 던질 때도 세기를 조절할 수 있다. “어떻게 지내”는 세기가 거의 0에 가깝다. “그 일 아직도 신경 쓰여”는 세기가 조금 더 올라간다. “나랑 이 얘기 진지하게 해 볼까”는 세기가 1에 가깝다.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합의 세기만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보를 얻게 된다.
문제는 대부분 이 다이얼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기를 고르지 않고 습관적으로 강하게, 혹은 습관적으로 약하게만 묻는다. 다이얼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 언제 엿보고 언제 확정 지을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다이얼을 조절하는 감각은 신뢰와도 관련이 있다. 세기를 낮게 유지할수록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도 적어진다. 강하게 물으면 상대는 답을 내놓아야 하는 부담을 진다. 약하게 물으면 답하지 않아도 무례가 되지 않는다. 엿보기를 잘하는 사람은 어쩌면 이 부담의 크기를 세밀하게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이론으로 남았다면 여기서 멈췄을 것이다. 2011년, Kocsis를 비롯한 연구팀이 이것을 실제로 실험했다. [2]
이중슬릿 실험은 양자역학에서 가장 유명한 역설 중 하나다. 광자가 두 슬릿을 동시에 지나가야만 스크린에 간섭무늬가 생긴다. 그런데 광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 확정하는 순간 — 강측정을 가하는 순간 — 간섭무늬는 사라진다. 경로를 아는 것과 파동성을 유지하는 것은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 오랫동안 양자역학의 상식이었다.
이 연구팀은 광자의 운동량을 약측정하고, 위치는 강측정으로 확정하는 과정을 아주 많은 광자에 걸쳐 반복했다. 운동량 정보는 광자의 편광 상태에 아주 살짝 흔적을 남기도록 설계했다. 편광을 강하게 확정 짓지 않고 살짝 회전시키는 정도로만 결합시킨 것이다. 그 결과를 평균 내서 광자들의 평균 궤적을 재구성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간섭무늬는 무너지지 않았다.
경로를 엿봤는데 — 무늬는 그대로 있었다. 강측정이었다면 둘 중 하나만 가능했을 것이다. 무늬가 있거나, 경로를 알거나. 약측정은 그 이분법을 깼다. 완전한 경로는 아니지만, 경로에 대한 정보와 무늬가 만들어지는 파동성이 동시에 남았다.
```mermaid
flowchart LR
S["광자 발생"] --> D{"측정 방식"}
D -->|강측정| C1["경로 확정\n간섭무늬 붕괴"]
D -->|약측정| C2["경로 정보 일부\n간섭무늬 보존"]
C1 --> R1["둘 중 하나만\n남는다"]
C2 --> R2["정보와 가능성이\n함께 남는다"]
```
무너지지 않은 무늬. 엿보는 일이 성립하는 자리가 정확히 여기다.
다만 이 실험이 광자가 정말로 하나의 “경로”를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재구성된 궤적이 봄 역학이 말하는 궤적과 정말 같은 것인지를 두고도 물리학계 안에서 이견이 있다. 엿보기로 얻은 정보가 무엇을 “진짜로”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해석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불확실성이 오히려 이 글의 논지를 보강한다. 약측정으로 얻은 정보는 애초에 강측정이 주는 것과 같은 종류의 확실성을 약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멈추면 이 비유가 너무 매끄러워 보인다. 두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약측정 한 번은 사실상 거의 아무 정보도 주지 않는다. 결합을 약하게 했다는 것은 신호가 노이즈에 묻힌다는 뜻이다. 의미 있는 값을 얻으려면 같은 조건에서 수없이 반복하고 평균을 내야 한다. Kocsis의 실험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의 슬쩍임으로 궤적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광자에 걸친 옅은 신호들이 쌓여서야 궤적이 드러났다.
이건 삶의 엿보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번 슬쩍 던진 질문, 한 번 낭독해 본 문장 — 그 한 번은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복된 옅은 신호들이 쌓여야 방향이 보인다. 관계가 어디로 가는지는 한 번의 대화가 아니라, 여러 번의 사소한 확인들이 평균으로 알려준다.
둘째, 약측정에서 얻은 값은 전측정 상태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후측정 — 나중에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 이 함께 있어야 그 값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해석된다. 아하로노프와 바이드먼이 이후 발전시킨 이상태벡터 형식에서는, 계를 앞으로 가는 파동함수와 뒤로 가는 파동함수 둘 다로 기술한다.
이 부분이 이 글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다. 엿본 정보의 의미는 엿보는 그 순간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나중에, 결국 무엇으로 붕괴했는지를 알고 나서야 — 그때 엿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온전히 해석된다. 약측정은 미래의 확정과 무관하게 홀로 의미를 갖는 정보가 아니다.
이 두 조건이 있다고 해서 약측정이 이론적 유희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약한 값 증폭은 실제로 아주 미세한 물리량의 변화를 감지하는 정밀 계측 기술로도 쓰인다. 신호가 너무 작아 강측정으로는 잡히지 않는 것들이, 전측정과 후측정을 나란히 두는 방식으로는 드러난다. 작은 것을 보려면 오히려 세게 보지 않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반복해서 마주치는 패턴이 하나 있다. 제한된 기저와 빠른 붕괴는 실수를 양산한다는 것.
기저가 좁으면 물을 수 있는 질문의 종류 자체가 줄어든다. 예 아니면 아니오, 맞다 아니면 틀리다 — 이런 이분법적 기저에서는 아무리 정확하게 측정해도 이분법적인 답만 나온다. 그런데 그 답이 빠르게, 강하게 확정되어 버리면 기저가 좁았다는 사실 자체가 가려진다. 답이 확실해 보일수록 기저를 의심하기 어려워진다.
동료들을 관찰하다 알게 된 패턴이었다. 빠른 판단이 틀렸을 때, 대부분은 판단의 논리 자체가 틀린 게 아니었다. 물었던 질문의 기저가 처음부터 너무 좁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좁음은 판단이 빠르고 확신에 차 있을수록 오히려 더 안 보였다.
약측정은 이 문제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답을 서두르지 않으면 기저를 넓게 유지한 채로 여러 번, 여러 각도에서 정보를 모을 수 있다. 한 번에 확정하지 않으니 처음의 좁은 기저에 갇히지 않는다. 반복된 옅은 신호들이 쌓이면서 오히려 기저 자체가 넓어진다.
엿보는 일이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기술인 이유가 여기 있다. 빠른 붕괴를 무조건 피하는 것이 아니라, 붕괴가 일어나기 전에 기저를 충분히 넓혀두는 작업이다.
이 두 조건을 염두에 두고, 삶에서 반복되는 이 구조를 나열해 본다.
초고를 쓴다. 아직 발행하지 않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이건 확정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니다. 문장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 어디서 걸리는지 — 강하게 다듬기 전에 약하게 알아본다. 강한 퇴고는 문장이 가질 수 있었던 다른 가능성들을 지운다. 약한 낭독은 그 가능성들을 건드리지 않은 채로 정보만 가져간다.
관계도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단정 짓지 않고 슬쩍 물어보는 말들이 있다. 이번 주말에 뭐 하는지 묻는 것은 강측정이 아니다. 대답을 확정하려는 질문이 아니라 — 상대가 시간을 내줄 의향이 있는지, 그 결합의 세기를 아주 약하게 재보는 질문이다. 확답을 요구하는 순간 관계는 강측정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거절 아니면 승낙. 중첩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아이디어를 놓고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브레인스토밍 중에 나온 말을 그 자리에서 바로 평가하면 — 좋다 나쁘다로 강붕괴시키면 — 그 아이디어가 다른 방향으로 자랄 가능성이 그 순간 함께 사라진다. 진행이 잘 되는 브레인스토밍은 평가를 미룬다. 판단을 유예한 채로 정보와 방향성만 슬쩍 가져간다. 이것도 약측정이다.
스스로에게도 같은 방식을 쓸 때가 있다. 이 일이 정말 하기 싫은 건지를 강하게 묻지 않는다. 강하게 물으면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오로 붕괴하고, 그다음부터는 그 대답에 맞춰 나머지 감정들을 편집하기 시작한다. 대신 슬쩍 관찰한다. 그 일을 떠올릴 때 몸이 어떤 리듬으로 반응하는지. 결론은 유예한 채로, 반복해서.
새 프로젝트 제안을 받을 때도 같은 구조가 있다. 바로 수락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요구사항 몇 가지를 슬쩍 물어본다. 이건 계약을 확정하려는 질문이 아니라 — 이 일이 감당할 만한 결합인지 세기를 낮춰 재보는 질문이다. 답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수락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 강하게 몰아붙이는 면접식 질문과 다른 점이다.
계약서 초안을 검토할 때도 마찬가지다. 조항 하나하나를 그 자리에서 확정 짓기 전에 전체 구조부터 슬쩍 훑어본다. 어디가 걸리는지, 어떤 조항이 유독 눈에 밟히는지 — 이것도 약측정이다. 조항 각각을 강하게 판단하기 시작하면 전체 구조를 보는 눈은 그 순간부터 좁아진다.
소설을 쓸 때도 같은 구조를 쓴다. 인물의 성격을 문장으로 못 박기 전에, 여러 상황에 슬쩍 놓아본다. 이 인물이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 초고 단계에서는 그 반응을 확정하지 않고 여러 버전으로 흘려본다. 캐릭터 시트에 성격을 강하게 적어 넣는 순간 인물은 그 문장 안에 갇힌다. 슬쩍 놓아보는 여러 장면들이 쌓여야 인물이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드러난다.
이 구조를 가장 손에 잡히게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버전 관리다.
`git diff`는 확정이 아니다. 지금 작업 디렉터리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보여주지만, 그 변경을 이력에 새기지는 않는다. 언제든 되돌릴 수 있다. 파동함수로 치면 중첩이 유지된 채로 — 무엇이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만 살짝 새어 나오는 상태다.
`git stash`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약측정이다. 변경사항을 지우지 않고 따로 밀어 둔다. 커밋도 아니고 폐기도 아니다. 타임스탬프가 없는 채로, 현재시제로 대기한다. 보류 큐와 정확히 같은 구조다.
`git commit`이 강측정이다. 그 순간 변경사항에 해시와 타임스탬프가 붙는다. 과거시제가 된다. 이력에 새겨지고 나면 — 그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가능한 변경들, 시도했다가 되돌렸던 방향들은 이력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커밋 메시지 하나가 그 순간의 유일한 진실이 된다.
개발자에게 diff와 stash가 익숙한 이유는, 코드를 다루는 일 자체가 확정과 확정 이전 사이를 계속 오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각이 코드 밖에서는 잘 안 옮겨진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diff 단계 없이 바로 커밋하려는 습관이 있다. 엿보는 일이 유독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이 감각 하나가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앞서 쓴 글과 만난다.
“경로 적분”에서는 선택되지 않은 경로들도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이미 기여했다고 썼다. [3] 그런데 그 글은 붕괴가 끝난 이후, 이미 확정된 이후를 다루는 글이었다. 지금 이 글은 그 이전을 다룬다. 아직 붕괴가 일어나기 전, 가능성들이 살아있는 채로 정보를 꺼내는 방법.
앤실라 채널이 하는 일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메인 레지스터는 건드리지 않는다. 별도의 처리 공간을 통과시켜서 측정 신호만 빼낸다. 그리고 리셋한다. 메인 레지스터의 중첩은 유지된 채로 남는다.
보류 큐도 마찬가지 구조다. 타임스탬프 없이 현재시제로 남아있는 항목들. 그것들을 강제로 커밋시키지 않고도 지금 무엇이 대기 중인지는 확인할 수 있다. 큐를 들여다보는 행위 자체가 약측정이다.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과, 그것을 확정 짓는 것은 다른 일이다.
엿보는 일을 기술로 다시 정의하면 이렇게 된다. 결합을 약하게 유지한 채로 신호를 통과시키는 것. 반복해서, 그리고 나중의 붕괴를 기다리며. 관계를, 문장을, 감정을, 아이디어를 — 붕괴시키지 않고 아는 방법.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제목이 다르게 읽힌다.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확정하는 순간 — 강측정이 일어나는 순간 —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친구 아니면 적. 그런데 그 이전의 시간에는 둘 다이면서 둘 다 아닌 무언가가 있다. 그 드라마가 오래 회자되는 것은, 확정 이후가 아니라 확정 이전의 상태를 붙잡아 제목으로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빠른 붕괴의 관점에서 다시 보면, 그 이야기가 그리는 세계는 정확히 좁은 기저 위에서 작동하는 세계였다. 적 아니면 아군, 복수 아니면 화해 — 두 개의 값만 허용하는 세계에서 인물은 계속 빠르게 판단하도록 내몰린다. 그런데 정작 오래 남은 것은 그 좁은 기저 자체가 흔들리던 장면들이다.
약측정이 알려주는 것도 같다. 확정 이전의 상태가 정보가 없는 상태는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개와 늑대 사이, 그 실루엣이 가진 정보는 — 개로 확정되는 순간에도, 늑대로 확정되는 순간에도 함께 사라진다. 오직 그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정보.
가능과 불가능 사이를 엿본다는 것은 그러니까 우유부단이 아니다. 확정하면 사라질 정보를, 확정하기 전에 반복해서 붙잡아 두는 일이다.
이 글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온라인카지노에 올리는 이 문장들도 확정이 아니다. 결론을 냈다기보다, 반쯤 형성된 생각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행위에 가깝다. 발행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도 — 이 개념이 최종적으로 맞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독자가 읽고 반응하는 과정 자체가, 이 생각에 대한 후측정에 가깝다.
그래서 이런 글은 정답을 내놓는 글이 아니라 구조를 보여주는 글이 되려고 한다. 결론을 강하게 밀어붙이면 읽는 사람은 동의하거나 반박하거나 둘 중 하나로 붕괴한다. 대신 구조만 보여주면, 읽는 사람 각자가 자기 삶의 어떤 장면에 이 구조를 슬쩍 대어볼 수 있다. 그 대어 보는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약측정이다.
한 편의 글이 다음 글의 전측정이 되는 셈이다. 이 글도 언젠가 다른 글에서 다시 다뤄질 것이고, 그때 가서야 지금 여기서 무엇을 놓쳤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슬쩍, 반복해서 붙잡아 두는 정도로 충분하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강측정은 빠르다. 하나의 값을 내놓고 끝난다. 대신 그 값이 나오지 않았을 다른 모든 가능성을 함께 지운다. 약측정은 느리고, 흐릿하고, 한 번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 흐릿함이 반복해서 쌓이면, 확정된 값 하나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무늬가 드러난다.
가능과 불가능 사이의 폭. 그 폭이 좁아지는 방향과 속도,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의 기미 — 이것들은 결과만 보면 사라지는 정보다. 그리고 그 정보의 의미는 나중에, 무엇으로 결론이 났는지를 알고 나서야 완전히 해석된다.
그래서 엿보는 일은 미루는 일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앎이다. 확정을 유예하는 동안에만 읽을 수 있는 무늬가 있다. 개와 늑대 사이, 붉게 물든 그 짧은 시간에만 보이는 것처럼.
이 폭을 다이얼로 다루는 것 — 언제 세기를 낮추고 언제 올릴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 — 이 결국 좁은 기저에서 빠르게 붕괴하는 실수를 피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일 수 있다.
확정은 필요하다. 언젠가는 커밋해야 하고, 언젠가는 답을 해야 한다. 다만 그 확정이 좁은 기저에서 너무 빨리 오지 않도록 — 그 사이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하나 더 갖는 것. 엿보는 일이 하는 역할은 어쩌면 그 정도인지도 모른다.
[1] Aharonov, Y., Albert, D. Z., & Vaidman, L. (1988). How the Result of a Measurement of a Component of the Spin of a Spin-1/2 Particle Can Turn Out to be 100. Physical Review Letters, 60(14), 1351–1354.
[2] Kocsis, S., Braverman, B., Ravets, S., Stevens, M. J., Mirin, R. P., Shalm, L. K., & Steinberg, A. M. (2011). Observing the Average Trajectories of Single Photons in a Two-Slit Interferometer. Science, 332(6034), 1170–1173.
[3] 공인식. (2026). 경로 적분: 선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Brunch. fishingproductfr.com/@alwayswith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