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써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더미 문장들로부터 내가 리터칭 한 문장들을 만들어 보겠다고 생각하니, 팩트 이외의 것들이 오히려 노이즈로 분류가 되네.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느낀 것들이 뇌의 손실 압축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거꾸로 그 노이즈를 복구하려고 글을 쓰고 그런 노력을 들인 글을 찾아 읽고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사라진 노이즈는 기록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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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도가 정확한 지점을 짚은 것 같아. 더미 문장 단계에서 “팩트”만 신호로 분류하는 건, 사실 인식 자체가 이미 한 번 손실 압축을 거친 결과물을 다시 압축하는 거니까. 노이즈 제거가 아니라 압축의 중첩이지.
그런데 경로 적분 글이랑 겹쳐 보면 비대칭이 하나 보여. 선택되지 않은 경로는 그래도 진폭으로 남아 — 측정은 일어났고, 다만 committed가 안 됐을 뿐. 근데 지각이 사라뜨린 노이즈는 측정 자체가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잖아. 진폭이 기록조차 안 된 거. 그러니까 글쓰기로 그걸 “복구”한다는 건 사실 복구가 아니라, 있었을 법한 진폭을 새로 commit 하는 거 아닐까. 기억에서 꺼내는 게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측정을 처음 수행하는 것.
그렇게 보면 소설이 “허구”라는 게 결함이 아니라 — 이게 회수가 아니라 신규 측정이라는 걸 정직하게 표시하는 라벨일 수도 있겠어. 더미 문장을 리터칭 하는 작업도, 사라진 원본 노이즈를 찾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새 진폭을 기입하는 행위로 다시 정의되는 거고.
그래, 있을 법한 진폭. 소설을 쓰는 작가 측면에서는 그렇긴 하지.
그러면, 자기가 경험한 세상과 자연 현상의 묘사는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사건들보다 나는 그런 쉽게 묘사하기 어려운 자연 현상들을 떠올리면서 앞의 문장들을 만들어냈겠다 정리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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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이산적이다. 발생했다/안 했다, 강측정의 고윳값 하나. 그런데 자연 현상을 지각하는 경험은 그렇게 안 떨어져. 바람의 질감, 빛이 바뀌는 속도, 공기의 밀도 — 이건 한 번의 측정으로 고윳값 하나를 뽑아내는 게 아니라, 계속 약하게 찔러보면서 노이즈 섞인 신호를 누적시키는 쪽에 더 가깝지.
그게 양자역학에서 연속 약측정(continuous weak measurement)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조가 닮았어. 한 번의 측정으로 붕괴시키지 않고, 시스템을 계속 약하게 모니터링해서 양자 궤적(quantum trajectory)을 얻는 방식. 개별 측정값은 부정확하고 노이즈가 크지만, 누적되면 사건 하나로는 안 잡히는 연속적인 흐름이 드러나.
그러니까 네 문장 생성 과정에서 사건보다 자연 현상이 먼저 떠오르는 건 — 더미 문장이 강측정 결과(사건)만 신호로 분류했는데, 실제로 네 지각이 기록해 둔 건 약측정 트레일이었던 거지. 사건은 트레일 위의 한 점이고, 네가 복구하려는 노이즈는 그 점들 사이의 연속 구간이야. ‘결’이라는 단어가 네 어휘에서 결맞음과 공명한다고 적어둔 것도 이 지점이랑 맞아떨어지는 것 같고 — 사건의 언어가 아니라 결의 언어로 묘사하려는 시도라고 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강력한 팩트의 나열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건 법조문이나 기타 그에 준하는 성격을 가진 것에 주로 쓰이고, 독자와 함께 공명할 수 있는 글은 ‘사라진 노이즈’를 얼마만큼 복구를 해 내느냐가 관건이겠네. 그 복구라는 것도, 내가 실제로 겪지 않았어도 누군가의 삶에 분명히 진폭으로써 존재했던 사건과도 닿아 있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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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문이 강측정에 최적화된 이유가 있지. 거기서는 모호성이 버그야. 모든 독자가 같은 고윳값을 뽑아내야 하고, 재현성이 생명이거든. 그러니까 노이즈를 의도적으로 제거한 신호 — 그게 법조문의 설계 목표지. 반면 문학에서 같은 일을 하면 그건 결함이 돼. 독자마다 다른 진폭으로 읽혀야 공명이 일어나는데, 강측정은 그 다양성을 미리 붕괴시켜 버리니까.
그리고 네가 짚은 지점이 핵심인 것 같아. 복구라는 게 자기 경험의 회수가 아니라면, 그 노이즈는 어디서 오는가. 답은 — 꼭 자기 삶의 트레일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지. 누군가의 실제 삶에서는 그 사건이 분명히 일어났고, 그 사람의 약측정 트레일 위에는 진폭으로 기록돼 있었어. 다만 그 사람이 그걸 글로 commit 하지 않았을 뿐이야. 작가가 하는 건 자기 기억을 복구하는 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채로 흩어져 있는 그 진폭장(amplitude field) 어딘가에서 있을 법한 패턴을 끌어다 새로 measurement를 수행하는 것에 더 가까워.
그러니까 공명이 일어나는 메커니즘도 다시 보이네. 독자가 “이거 내 얘기 같다”라고 느끼는 건 사실 확인이 아니야. 자기 안에 있던, 한 번도 committed 되지 않은 트레일이 텍스트 안의 트레일과 우연히 겹치는 거지. 그 겹침의 순간이 공명이고. 그래서 보편성이라는 말도 다르게 풀리는 것 같아 — 모두가 겪은 사건의 합집합이 아니라,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지만 거의 모두의 트레일에 비슷한 모양으로 존재했던 그 미기록 구간을 작가가 먼저 찍어낸 것.
실제 일어났지만 충분히 전파되지 못한 중요한 이야기들도 기록되고 공유되기도 하니까. 잃어버렸다거나 결핍이라고도 정리할 수 있는 노이즈 복구를 향한 갈망이 글을 쓰게 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정리할 수도 있겠어. 여하튼,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 흐름을 만든 다음에 약간의 노이즈를 사건 중심에 흩어 놓고 그 노이즈를 선명하게 하는 LLM의 Transformer적 접근으로 문장을 만들어 내는 접근이 가능하겠다는 이야기로 정리하고 싶었나 봐. ‘노이즈’라는 키워드가 중요했던 스레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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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짚었어. 그런데 “Transformer적”이라고 한 부분에서 구조를 한 번 더 쪼개볼 수 있을 것 같아.
흩뿌린 노이즈를 점점 선명하게 만들어가는 그 과정 자체는 사실 디퓨전 모델의 구조에 더 가까워 — 노이즈에서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디노이징하며 신호를 회복하는 방식. Transformer의 self-attention은 그 자체로는 노이즈를 신호로 바꾸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각 토큰이 주변 맥락 중 어디에 더 무게를 줘야 하는지 계산하는 연산자야. 근데 둘이 대립하는 게 아니라 결합되는 지점이 있어 — 최근 디퓨전 모델들(DiT 계열)은 디노이징 스텝마다 attention을 연산자로 써. 그러니까 네가 떠올린 그림을 정확히 말하면: 사건 중심 뼈대가 conditioning 역할을 하고, 그 주변에 흩어놓은 노이즈가 디노이징 대상이고, attention이 매 단계마다 “이 노이즈를 사건과의 관계에서 어디로 끌어당길지”를 결정하는 연산자인 거지.
이걸 지금까지 스레드 언어로 옮기면 더 깔끔해져. 사건 = 이미 committed 된 강측정 지점, 노이즈 = 보류 큐에 있는 미기록 약측정 트레일 후보들. 생성 과정은 그 노이즈를 무작위로 선명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라는 conditioning이 트레일의 모양을 어느 방향으로 끌어당길지 매 단계 결정하면서 점진적으로 committed 시켜가는 거고. 그러니까 “노이즈를 선명하게 한다”는 표현이 곧 — 진폭장 어딘가에 있던 후보 패턴 중 사건과 가장 정합적인 것을 골라 새로 측정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야.
이 스레드를 관통한 키워드가 ‘노이즈’였다는 정리, 맞는 것 같아. 사건만 신호로 분류했던 더미 문장의 출발점, 거기서 누락된 것의 정체, 그걸 복구하려는 갈망이 글쓰기의 동력이라는 결론, 그리고 그 복구 메커니즘을 생성 모델의 구조로 다시 읽는 것까지 — 전부 노이즈를 신호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신호가 누락시킨 것으로 재정의하는 한 줄로 이어지네.
그렇지, 뇌의 손실 압축이 만들어낸 결핍의 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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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해소이자, 그 결핍이 애초에 결핍이 아니라 진폭이었다는 걸 사후적으로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하고.
손실 압축이 버린 것 — 그게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글쓰기가 그걸 복구한다고 말하는 순간, 동시에 “버려진 것도 한때 거기 있었다”는 걸 입증해 버리는 셈이지. 경로 적분 글에서 했던 말과 같은 모양이네. 없었던 것이 아니라 — 여기 있었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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