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장편소설 《백서》를 읽고
"이곳 조선의 신생 교회가 겪고 있는 피의 박해와 짓밟힌 영혼들의 부르짖음을 굽어살피소서. 한 자락 비단 위에 먹물로 꾹꾹 눌러쓴 이 눈물의 호소가 바다를 건너 저 멀리 거룩한 땅에 닿을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이 땅에 참된 천주의 사랑과 평화가 다시금 피어날 수만 있다면, 저는 기꺼이 한 자루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겠나이다."— 소설 《백서(帛書)》 중에서
오랫동안 수필을 쓰고 읽으며 일상의 미시적인 아름다움과 삶의 소박한 진실을 문장으로 길어 올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연스레 서가를 채우는 바카라들도 삶의 궤적을 닮은 에세이나 평론 집들이 주를 이루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한동안 나에게 조금은 먼 동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상훈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백서》의 서평단 모집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황사영 백서'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소설이라는 소개를 본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뜨거운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평소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었던 터라 역사소설에 대한 친숙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이끈 것은 내 삶의 가장 뿌리 깊은 근간인 '신앙'의 이끌림이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청 버튼을 눌렀고, 감사하게도 찾아온 기회 덕분에 바카라을 손에 쥐자마자 그 자리에서 단숨에 마지막 바카라장을 덮었다.
이 바카라은 단순한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오랜 기억 속 페이지들을 하나씩 들추어 깨우는 거대한 영적 파도와도 같았다.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의 자녀로 살아가고자 했던 순수한 신앙의 기억들, 그리고 한때는 하느님의 제단에 온전히 삶을 봉헌하고자 신학교에 가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했던 청춘의 뜨거웠던 나날들이 활자 사이사이로 선명하게 베어 나왔다. 무엇보다 1984년,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내한하여 한국 가톨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인 '103위 시성식'을 거행했던 그 뜨겁던 여의도 광장의 한복판에 내가 있지 않았던가. 수많은 인파 속에서 느꼈던 온몸을 휘감던 전율과 성령의 열기,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사실에 눈물 흘렸던 그날의 기억이 소설 속 신유박해와 황사영의 고독한 투쟁과 겹쳐지며, 나는 서평가가 아닌 한 명의 박해 시대 신자가 되어 소설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소설 《백서》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아프고도 찬란했던 순간들을 이상훈 작가 특유의 밀도 높은 필력과 철저한 고증으로 복원해 낸 역작이다. 바카라의 목차를 따라가다 보면 이벽에 의해 조선 천주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부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그리고 1784년 정약용과 정약전이 세례를 받으며 학문이 아닌 '신앙'으로서 천주교가 정착해 가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명례방 사건과 진산 사건, 그리고 신해박해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는 평소 교리서나 교회사 참고서적들을 통해 머리로만 알고 있던 지식의 파편들을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끄집어내었다.
작가는 황사영이라는 인물이 지닌 인간적인 고뇌와 영적 성장을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어린 나이에 장원에 급제하여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천재 문사 황사영이 정약현의 딸 명련(마리아)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을 통해 천주교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는 과정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가슴 시리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와 함께 찾아온 노론 벽파의 대반격,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의 피바람 속에서 정약종의 죽음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으며 황사영이 느꼈을 절망의 깊이는 감히 헤아리기 조차 어렵다.
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 어둡고 좁은 토굴 속에 몸을 숨긴 채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붓을 들었다. 그리고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얇은 흰 비단(백서) 위에 13,311자라는 방대한 글자를 깨진 먹과 눈물로 채워 나갔다. 박해의 참상과 순교자들의 행적,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간절한 요청이 담긴 그 비단 편지는 조선 교회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웅변이었다. 하지만 이 백서는 빛을 보지 못하고 압수되었고,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게 된다.
소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황사영의 뜻을 이어받아 조선 최초의 신학생이자 평신도 지도자로서 교회의 재건을 위해 온 삶을 바친 정하상 바오로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마재 성지에서 정약용이 겪었던 학자이자 신앙인으로서의 번민, 그리고 홀로 남겨진 여인들과 추자도로 유배 간 황경한의 슬픔까지, 작가는 순교자들의 찬란한 영광 뒤에 가려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끈질긴 신앙의 전승을 놓치지 않고 조명한다. 그리하여 1901년, 황사영이 순교한 지 125년 만에 로마 교황청으로 전달된 백서의 운명을 보여주며, 그들의 피 흘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감동적으로 증명해 낸다. 이미 알고 있던 박해의 역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설로 만나는 순교자들의 한숨과 기도 소리는 내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고, 바카라을 읽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바카라은 매너리즘에 빠져 삶과 신앙의 불꽃을 잃어버린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 바카라을 강력히 추천한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유롭게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신앙의 대지는 박해 시대 신앙 선조들이 목숨과 바꾼 피의 제단 위에 세워진 것이다. 미사 한 번을 드리기 위해 깊은 산속 토굴로 숨어들어야 했고, 신부님의 얼굴을 한 번 뵈옵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그들의 간절함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이 소설은 차갑게 식어버린 우리의 신앙을 뜨겁게 달구어 줄 강력한 영적 각성제가 될 것이다.
또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이 시대의 청년들과 현대인들에게 추천한다. 황사영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과 민초들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안락한 삶을 모두 버리고 오직 '하느님 나라'라는 거대한 희망을 향해 걸어갔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그들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눈앞의 고통 너머에 있는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불굴의 의지와 숭고한 선택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흔들리고 좌절하는 현대인들에게 인생에서 정말로 지켜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진정한 희망은 어디서 오는지를 깊이 있게 성찰하게 만들어 준다.
소설 《백서》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다시 1984년 그 뜨거웠던 여의도 광장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나지막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우고, 103위 성인들의 이름이 하늘 높이 울려 퍼지던 그 순간, 신학교에 가고자 꿈꾸었던 어린 청년의 가슴속에는 오직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만이 가득했었다. 세월이 흘러 수필가가 되어 일상의 언어를 만지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내 영혼의 고향은 언제나 그 순교자들의 피와 눈물이 흐르는 땅에 닿아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금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상훈 작가가 붓으로 되살려낸 황사영의 백서는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신앙의 편지이다. "당신은 지금 박해 없는 세상에서 어떤 신앙을 살아가고 있습니까?"라는 무거운 질문이 마음속에 웅장하게 울린다. 천주교의 탄생과 고난의 역사를 이토록 가슴 절절하게 그려낸 작품을 만난 것은 수필가로서도, 신앙인으로서도 크나큰 축복이다. 선조들이 피로 쓴 백서의 문장들을 이제는 내 삶의 잉크로 이어 써 내려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특히 모태에서부터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며 자라온 모든 신앙인들에게 이 눈물 가득한 희망의 대서사시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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