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의 우아함
로마에서의 하루는 연일 계속되는 폭염과 밀려드는 관광객들 사이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더군다나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가방을 열어 지갑을 확인하고 소지품을 확인해야 하는 정신적 극기 체험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숙소에 돌아오면 온갖 진이 빠지는 느낌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트레비 분수, 콜로세움, 스페인 광장까지 둘러보고 나니 막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앞으로 남은 이곳에서의 여정은 쉬엄쉬엄 둘러보며 동네 구경 겸 사람 구경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 걱정 없이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는 호사를 누리면서...
급하게 잡은 에어비앤비는 시내와는 동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한여름에도 에어컨이 없어도 될 만큼 방은 시원했고 주인과 집을 같이 셰어해야 했지만 화장실과 방은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불편함 없이 머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호스트 분은 자기 커플과 자기 집을 방문하는 몇몇의 친구들이 부엌을 함께 사용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어디서 계속 사람들이 등장하는지 이 작아 보이는 부엌을 드나들 때마다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했야 했다.
그중에서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려고 부엌에 갈 때면 부스스한 머리로 등장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키는 족히 190센티미터가 넘는 것 같고 무릎이 어디까지 나온 건지 축 늘어진 운동복 차림과 빗은 지 한참이 되어 보이는 머리 스타일, 손가락 하나에만 매니큐어를 바른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나에게는 커피 머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르쳐주고는 자신은 모카포트에 커피를 끓여 우아하게 테이블매트를 깔고 커피와 빵을 먹는 사람.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자기가 구운 케이크를 맛보라며 정성스럽게 칼로 자른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역시나 테이블 매트를 펼쳐서 세팅을 해준다. 커피에 타서 먹을 수 있는 흰 설탕, 갈색 설탕, 설탕 대체제와 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취향에 맞게끔 타서 먹으라고 한다.
좁은 테이블에 너무나도 어색하게 단 둘이 앉아 아침을 먹는데 커피와 빵을 어찌나 조용히 음미하는지 그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도 행여 그의 식사가 방해가 될까 스몰 토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다시 한번 부스러기를 조심스레 모아 정리를 하고 매트를 정리하고 커피잔을 정리하는데 일종의 잘 훈련된 군인처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행위에 왠지 모를 우아함이 느껴졌다.
다음날도 아침에 일어나 부엌에 나서니 역시나 부스스한 그가 모카 포트에 커피를 끓이고 있다. 역시나 고요하게. 컵라면을 먹으려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려고 하니 80도와 100도 중에서 원하는 물의 온도를 알려 달라고 한다. 빨리 컵라면 하나를 포크로 섞어 훌훌 먹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디선가 등장한 젓가락과 젓가락 받침대, 역시나 등장한 테이블 매트. 컵라면 하나도 허투루 먹지 않는 게 이곳 사람들이 먹는 것에 진심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축적된 테이블 매너인 건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세팅된 컵라면은 훌훌 먹을 순 없다. 괜히 한번 더 면을 음미하게 되고 국물도 감탄하게 되고 젓가락도 몇 번 받침대에 놓게 된다.
일련의 태도와 루틴이 만들어낸 기품이라는 건 단순히 겉모습과는 별개로 한 사람의 정신을 보여준다. 겉만 번지르르하면 됐지 하며 무심코 지나친 수많은 안의 것들을 생각한다. 누가 뭐라든 다시 꺼내서 차곡차곡 정리를 하고 정성을 들여 재정렬하고 싶어진다. 우아하게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