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유치원 때문에 그림바카라을 폈다가 내가 빠져버렸다

by알레

아이들을 위한 그림바카라이라는데, 어른이 봐도 원래 이렇게 감동적이면서 재밌기까지 한 거였나?


친한 그림바카라 작가님 덕분에 그림바카라이 어른들에게도 감동과 통찰을 전달할 만큼 매력적인 바카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그림바카라을 찾아 읽거나 그림바카라 작가님들을 따로 알고 있진 않았다. 서점에서 그림바카라 코너를 들르는 경우는 오직 하나, 아이 유치원에 북토크가 예정됐다는 안내를 받았을 때뿐이었다.


이번에도 그 이유로 아내와 함께 서점을 찾았다. 다행히 집 근처 서점에 대부분의 바카라이 구비되어 있었다. 여러 권을 다 살 순 없어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골라 펼쳐보았다.


무작위로 집어 든 바카라의 첫 장을 넘겼다. 파란 물 웅덩이 그림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순간 바다가 있는 휴양지로 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보람 작가님의 '모두 참방'이라는 바카라이었다. 이야기는 이랬다. 똑같은 물 웅덩이를 앞에 두고 개미는 '바다'라고, 다람쥐는 '호수'라고, 토끼는 '연못'이라고, 그리고 아이는 그냥 '웅덩이'라고 표현한다. 같은 것을 바라보는 눈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 단순한 이야기인데 한참을 그 자리에서 페이지를 넘겼다.


바카라에서 여행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집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바카라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바카라들이 무미건조하게 다가왔다. 그림도 없고 알록달록한 색감도 없는 바카라들을 치우고 그림바카라으로 꾸며놓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읽어야 하기에 읽는다. 마치 먹지 않으면 죽으니 먹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독서의 즐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아주 애매한 위치에 서있는 독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면 독서 습관을 들여주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솔직한 셀프 평가: 아빠의 더 적극적인 노력을 요함.


자녀에게 독서 습관을 길러주고 싶으면 거실에 앉아 바카라을 보라는 말이 있다. 우리 부부는 바카라보단 드라마를 즐겨 본다. 아이도 당연히 미디어를 더 좋아한다. 집에 있는 아이의 바카라들이 재미없는 것도 문제다. 3~4세 때 보던 바카라들이 대부분이라 읽어줄 맛이 안 난다. 거실을 점령한 장난감들이 바카라장의 접근성을 막고 있는 것도 한몫한다. 핑계라는 거 안다. 다만 아이가 있는 집은 알 것이다.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결국 나의 의지를 높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재밌는 바카라을 만나는 것인데, 그림바카라이 제격이라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서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그랬다. "유치원에서도 그림바카라 대여할 수 있는 거 알아?" 세상에. 알림장을 꼼꼼히 살피지 않은 탓에 전혀 몰랐다. 이왕 마음먹은 거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서점에서 펼쳐본 그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개미에게는 바다이고, 다람쥐에게는 호수이고, 토끼에게는 연못이고, 아이에게는 웅덩이인 그것. 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 이렇게나 다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새삼 자극이 됐다.


어쩌면 글쓰기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누군가는 바다로 보고, 누군가는 웅덩이로 본다. 내가 오늘 무엇을 바다로 볼 수 있는지가 결국 내가 쓸 수 있는 글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조만간 아이의 바카라장을 싹 뒤집어엎어야겠다.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주에 오시는 그림바카라 작가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덕분에 웅덩이를 바다로 보는 눈을 다시 갖고 싶어졌다. 그 눈으로, 다시 글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