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왜 눈치가 없을까?

고맥락 인간이 AI와 일하며 배운 저맥락 소통법

by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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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튜브 알고리즘이 쇼츠 하나를 띄워주었다. 한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한 언어학자가 AI와 인간의 대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근 LLM이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을 언어학적으로 풀어내어 유명세를 얻고 있는 학자였다. AI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주제로 강연도 자주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 특히 엔지니어들에게서 자주 발견하는 특징 하나를 이야기했다. AI에게 꽤 복잡한 일을 시키면서도 프롬프트는 의외로 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걸 만들고 싶은데, 알아서 좀 해봐."


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알아서 해봐'라는 말은 고맥락(high-context)적인 표현이다. 말하는 사람은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듣는 사람이 상황과 의도, 앞뒤 사정을 알아서 파악하기를 기대한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 결과물이 어느 수준이어야 하는지 굳이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는다. 내가 이 정도 말했으면 네가 알아 들어야지. 그게 '알아서'라는 세 글자 뒤에 숨어 있다.


이 이야기를 듣다가 2년 전 내가 썼던 글이 떠올랐다. 미국에 처음 와 일할 때 나는 한국식 고맥락 화법 때문에 꽤 여러 번 낭패를 봤다. 매니저가 옆 팀으로 옮길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사실은 당장 가고 싶으면서 "지금 팀도 괜찮고, 내가 빠지면 힘들지 않겠어?"라고 돌려 말했다. 나는 그가 내 진짜 뜻을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내가 남고 싶은 줄 알았다. 그때 나는 꽤 거창한 교훈까지 얻었다. 우리는 말을 해야 아는 존재들이라고. 그런데 AI 앞에 앉으니 나는 다시 예전의 한국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AI에게 흔히들 '알아서 해봐'라고 명령하는 것도, 내가 익숙한 고맥락 화법의 연장선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말 이외에도 상황, 암시, 눈빛, 제스처 등의 비언어적 표현으로 의사소통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AI와 일을 하면서 녀석의 다재다능함에 놀란 나는 자연스레 이 녀석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생각했다. 아니 그래주길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척'하면 알아서 '착'하고 반응할 것이라 알게 모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은연중에 녀석을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 나랑 같이 손발을 맞춰와서 내 의도에 따라 알아서 척척 움직여주는.


그래서 가끔씩 프롬프트에 명령을 입력할 때도 많은 말이 생략된 형태로 입력하곤 했다. 이렇게 말해도, 이 정도는 알아듣겠지? 앞에서 설명한 것이 있으니까라고. 가령 이런 식이다.


"앞에서 사용한 포맷대로 데이터를 다시 정리해 줘"


결과를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건 빼야지"


다시 결과를 받았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고. 이 부분은 원래대로 하고, A열만 B로 바꾸라고.."


또 고쳤다.


"아이씨. 내가 중요하게 보는 건 그게 아니야..."


AI와 입씨름을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내 말을 못 알아들어 일을 못한 게 아니라, 내가 애초에 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대충 말하고, 그걸 알아먹지 못한다고 AI를 탓했다.


그런데 막상 제대로 설명하려고 하니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내가 원하는 것을 AI에게 정확하게 말하려면, 먼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즉,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지 않은 채 AI에게 던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정리되지 않은 내 생각까지 AI가 알아서 정리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건지도 모른다.


AI에게 제대로 일을 맡기려면 결국 내가 먼저 결정해야 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은 건드리면 안 되는지, 결과가 어떤 상태여야 좋은 것인지,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 그런데 그걸 하나씩 말로 꺼내 프롬프트에 써내려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내 머릿속에만 있던 맥락을 언어화하게 된 것이다. 고맥락 문화에 길들여진 내가 미국에서 일하면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야 한다'를 배웠는데, AI와 일하면서는 '말하려면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를 배운 셈이다.


그런데 요즘 AI는 점점 눈치가 늘어간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나와 쌓인 맥락을 더 많이 기억한다. 내가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보는지, 이전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까지 참고한다. 처음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해야 했는데, 이제는 가끔 내가 말을 덜 해도 먼저 알아채는 순간이 생긴다. 무서운 녀석.


나는 AI와 일하면서 점점 저맥락적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AI는 나와 오래 지낼수록 점점 고맥락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셈이다. 아이러니다.



-예나빠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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