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이어야 하는 실제적 이유

개발자에게 '글로벌 스탠더드'란 어떤 의미인가

by예나빠


미국에 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부모님을 포함 일가 친척분들은 많은 염려를 하셨다. 10년 넘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나라에서 새롭게 온라인 게임생활을 하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셨으리라. 그러면서도 막상 출국일이 다가오자 점점 응원을 해주시기 시작했다. 그때 사촌 형님이 해주셨던 격려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큰 아버지와 아버지 나이 차이가 꽤 있어서, 사촌 형님이라 해도 거의 아버지뻘이다).


"잘했다. 본디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 말이 이상하리만치 내게 힘이 되었다.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은 미국에 하루도 살아보시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형님의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뜻을 펼치라'는 더 오랜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의 지혜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더 마음에 다가왔다.


미국이 반드시 '큰 물'이라고 한 번에 퉁치기는 어렵다. 다만, 미국 현지에서 5년간 근무해보니 나는 형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미국이면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라는 어렴풋한 기대감뿐이었다. '워라밸이 좋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더 좋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와 같이 간접적으로 듣게 되어 느끼던 기대감.


이런 막연한 기대감에 선택한 미국행이었지만, 막상 '내가 미국 회사에서 근무해야 하는 이유'는 실제로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오늘은 내가 그 이유를 찾은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기술 표준화 과정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미국 회사로 이직한 뒤 동료로부터 워드 문서 하나를 받게 되었다. 특정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에 관련된 업계 표준 스펙 문서였다. API는 특정 분야의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개발자가 보다 손쉽게 프로그래밍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보조 도구와 이에 대한 규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통상 이 API는 표준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관련 업계가 통일된 개발 방법론을 공유하여,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이 서로의 제품에서 문제없이 동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표준화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표준만 제정하기 위해 운영하는 콘소시움이 주도하는 방식이다. 이는 통상 비영리 단체로 회원사의 회비만으로 운영된다. 이 단체에서 특정 기술의 개발 방법론에 대한 표준을 제정할 때, 관련 회원사들은 함께 모여 오랜 기간 토의를 거친다. 그리고, 마지막 합의를 통해 최종적인 스펙을 발표하게 된다 (합의라고 했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 자사의 기술을 표준에 포함시키려 이전투구가 벌어지곤 한다). 표준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회비를 납부한 회원사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비교적 과정이 투명하게 이뤄진다.


두 번째는 한 회사가 표준을 주도하는 방식이다. 그 회사가 기술이나 개발 방법론을 오랜 기간 독점한 경우다. 표준화 단체가 아니기에 엄밀히 말해 업계 표준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오랜 기간 업계가 그 회사의 방식으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왔기에, 향후에도 그 회사의 방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표준(de factor standard)인 셈이다.


표준을 주도하는 회사가 다음 버전의 스펙을 제정할 때는 평소에 협력하고 있던 회사들과 비공식적인 상의를 거친다. 스펙 초안에 대해 피드백을 받기도 하고, 기술 제안도 수렴한다. 그 회사는 업계에서 받는 피드백을 모아 최대한 공통 의견을 반영하고 향후 업계에서 필요할 수 있는 기술을 고려한다. 하지만, 역시 최종 스펙은 '업계의 합의'가 아닌 그 회사의 의사결정에 의해 제정되게 된다. 실로 막강한 권력인 셈이다.


내가 동료에게 받은 문서가 두 번째 방식으로 표준화가 진행되고 있던 특정 기술의 API 스펙 문서였다. 이 기술은 M사에 의해 오랜 기간 표준화가 주도되어 왔었다. M사가 다음 버전의 초안을 작성한 뒤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업계에 공유한 상황이었다. 회사 대표로 표준화 활동을 하고 있던 동료 K가 M사로부터 받은 문서를 공유해 준 것이었다. K는 M사에게 보낼 우리 회사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었다.


ms.png세계 PC, CPU, GPU, 게임 시장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M사


개발자에게 글로벌 스탠다드란


나는 가벼운 문화 충격을 받았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표준 스펙이 내 손에 떨어지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대략 짐작해서 알고는 있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특정 API에 대한 새로운 표준이 발표되면, 거의 같은 시기에 그 API를 지원하는 제품들이 시장에 출시되는 것을. API가 발표되는 시점이 아니라, 이를 제정하는 단계부터 제품 개발을 시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일정이 나올 수 없었다. 즉, API를 제정하는 회사는 이 API를 제품에서 지원하게 될 회사들과 사실상 발표 1~2년 전부터 그 내용을 공유해 온 것이다.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미국에서 새로운 표준이 발표되기라도 하면, 부랴부랴 발표된 스펙 문서를 다운로드하여 읽어 내려갔다. 이전 스펙 대비 새롭게 추가된 기능이 뭔지, 그 기능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를 빨리 파악해야 업계의 기술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연구 개발 중인 기술이 그 API를 지원할 제품 개발에 관련이라도 있으면, 해당 엔지니어들과 모여 분석하고 어떻게 제품에 적용할지를 그제서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M사와 협력 관계에 있는 미국 회사의 직원들은 사실상 나 같은 한국의 연구 개발자들보다 먼저 업계 기술을 접했던 것이다. 1~2년 후 업계에서 표준으로 발표될 기술 말이다. 기술 발달이 워낙 빠른 IT업계에서 1~2년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어떤 개발자는 공식적으로 기술이 발표된 이후에야 스펙 문서를 보고 공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개발자는 이미 수년 전에 그 표준을 접하거나, 심지어 제정하는데 관여까지 했다. 이들은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가 있었고, 콘퍼런스나 개발자 포럼에서 기술 발표를 주도했다.


혹자는 말한다. 해외 유수 대학의 강의도 온라인으로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오픈 소스가 일반화되어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최신 기술을 접하는 것은 어디서나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 강의에서 전하는 지식, 오픈 소스에 사용된 기술이 최초에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는 전 세계에 상대로 기술 파급력을 뿜어내는 미국의 학계와 업계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 태동하는 시기에 그 기술이 발현되는 과정의 내밀한 속사정은 미국 업계에 속한 내부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가 없는 것들이다.


물론, 한국이 세계 기술을 선도하는 분야도 있다. 메모리, 디스플레이가 대표적이다. 이런 분야에서는 표준화 콘소시움에서 한국 회사의 영향력도 상당히 크다. 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통신, AI/사물인터넷, 소프트웨어 산업에 걸쳐 IT 산업 전반적으로 미국 회사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을 발표할 때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는다. 업계가 세계 IT 기술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발표하는 모든 새로운 기술이 곧 세계 최초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흔히들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야 한다라고 한다. 비단 IT업계만이 아닌, 인문, 슬롯분야 심지어 최근엔 정치권에서도 이 말을 한다. 이는 기술이나 지식, 이념과 가치까지 세계에서 통용되는 방식을 우선하자는 뜻이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같은 개발자나 IT 종사자가 자신의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이 금과옥조와 같이 쓰는 말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키는 것이 아닌 만들어내는 입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IT 업계로 국한하자면 우리가 미국 회사에 속할 때 이 국제 표준을 주도할 기회를 접할 수 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김연아나 봉준호감독이 할 말이다.


1YYVAV3LE2_7.jpg야 임마. 난 그런말 한적 없어! 어디서 쌩구라를.


개발자가 미국 회사에서 근무해야 하는 이유


개발자가 미국 진출을 목표로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실제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세계 IT 기술을 선도하는 곳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세계 표준 즉 글로벌 스탠더드를 누구보다 빠르게 접할 기회를 갖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같은 개발자 커리어를 가지더라도 남들보다 항상 한 발 앞서는 입장이 된다. 이는 생애 경력 경로에서 큰 무기가 되어 준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개인 역량과 무관하게 절대로 한국에서는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큰 물에서 노는 것'은 '큰 물'에 들어가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예나빠



예나빠 온라인카지노 카지노 게임 소개


미국 연구원의 길 - 미국 기업 연구소, 연구원에 대한 정보 전달 잡지

미국 오기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 미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 경력자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미국에서 일하니 여전히 행복한가요 - 미국 테크 회사 온라인 게임 에세이

산호세에서 보내는 편지 - 실리콘 밸리에서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어쩌다 실리콘 밸리 - 팩션 형식으로 작성될 실리콘 밸리 입성기 (예정).


미술관에 또 가고 싶은 아빠 - 미술 + 육아 에세이

그래픽스로 읽는 서양 미술사 - 그래픽스 전공자 시선으로 바라본 미술사. 교양서.


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미국 오기 전 영어를 원어민 수준까지 올려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