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의 인재상
얼마 전 매니저를 통해 이력서를 한 장 받았다. 팀에서 인턴을 한 명 뽑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추천이 들어온 것이다. 지원자 A는 현재 모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학위 과정 중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해본 경험, 실리콘 밸리의 빅 테크 기업 몇 곳에서 인턴을 했던 경험까지 있었다. 이력서 상으로 A는 '인턴 후보'로서 좋은 점수를 받을 만했다.
화상 회의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A는 그동안 자신의 해왔던 일을 요약해 짧게 소개했다. 박사 학위 과정 중에 연구 프로젝트로 a, b, c를 해보았고, M회사에서 d라는 프로젝트, K회사에서 e라는 인턴 프로젝트를 했었다는 식이었다. 아이템 위주로 언급을 하다 보니 예상보다 발표시간은 짧아졌다. 구체적인 발표 슬라이드를 준비하지 않았던 A는 추가 질문을 받자 부랴부랴 개발 중인 데모 프로그램을 띄워가며 기술적 설명을 이어갔다.
연구직 인터뷰의 경우 자신의 과거 연구 실적을 정리해 1시간가량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후 면접관들과 다양한 질의응답을 통해 지식과 역량을 평가받게 된다. 정규직 연구원의 경우 통상 경력이 길고 기존 출판한 연구 논문 편수가 많기에 주로 대표 실적 위주로 발표한다. 다만, 인턴의 경우 경력이 상대적으로 짧아 1-2편의 논문 발표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A와 같은 지원자의 경우 능력을 평가하기 상당히 난감하다. 깊이 있는 기술적 질문을 던지기에는 보여준 것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력서를 다시 살펴본 나는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A는 이미 박사과정 5년 차였으나 아직 주저자로 쓴 논문이 없었다. 다양한 업계, 학계 프로젝트 경험을 쌓았고 구현 능력, 스킬 셋은 출중했으나 그 어떤 것도 결과로 마무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팀에 들어왔을 때 어떤 연구를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다양한 분야에 모두 관심이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답답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의 인턴 채용은 현재 '보류'상태로 놓여있다.
3년 전에 또 다른 인턴 지원자 B가 있었다. B는 석사 과정에서 진행했던 연구 결과를 기술 논문으로 체계적으로 작성한 뒤 논문 선공개 사이트인 아카이브(arXiv)에 공개했다. 정식 리뷰 과정을 거치는 학회나 저널을 통해 출판되지는 못했지만, 아카이브를 통해 B의 연구 내용이 업계에 노출될 수 있었다. B의 아이디어에서 신선함을 발견한 우리 팀은 그에게 직접 연락했고, 인터뷰를 거쳐 인턴으로 채용하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B에게 논문을 작성하기까지의 연구 과정과 기술적 내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B는 프로젝트 경험이 단 한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이디어 도출부터 구현, 실험, 그리고 그 결과를 논리적으로 기술하기까지 전체 연구 과정을 온전히 해냈던 것이다. 3개월의 인턴을 마친 B는 학교로 돌아가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박사과정 중에도 우리 팀에 재차 인턴으로 초대되었다. 지금은 파트타임 연구원으로 우리 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고, 다음 학기 졸업과 동시에 정규직 입사가 예정되어 있다.
앞에서 실리콘 밸리의 경력 과정에서 가장 초기 단계인 '인턴'의 예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A, B 두 친구의 경우를 통해 실리콘 밸리가 원하는 인재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A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제대로 된 전문성(expertise)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이런저런 경험은 많았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해 자신을 대표할 만한 전문성을 기르지 못했다. 이경우 실리콘 밸리에서 채용의 문을 넘기 쉽지 않다. 특히, 신입이 아닌 경력직의 경우 그간의 경력 동안 한 분야의 전문성을 쌓았는지가 매우 중요한데, 바로 실리콘 밸리가 '전문가(specialist)'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곳의 기업들이 일을 하는 방식, 그리고 그에 따라 인력을 채용하는 방식에 기인한다. 실리콘 밸리 기업들이 발표하는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는 다양한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이뤄진 결과물이다. 따라서, 조직은 각 전문 분야별로 구성되고 하위 조직으로 갈수록 그 분야는 점차 세분화된다. 조직이 실무자 수준까지 내려오면 해당 팀은 특정 업무에 매우 특화된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사원-대리(선임)-과장(바카라임)-부장(수석) 등의 직급으로 불리는 한국과는 달리, 이곳은 XXX software engineer, XXX hardware designer, XXX architect, engineering manager 등 실제로 하고 있는 업무로 직바카라명이 결정된다 (물론 내부적으로 우리와 같은 경력 레벨은 존재한다).
채용은 이런 전문가 집단에서 결원이 발생할 때 이뤄진다. 통상 회사에서 특정 직군의 채용 공고를 게시하면 공고마다 채용 기간이 설정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 응모한 후보자들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해당 직군을 공석으로 남겨두더라도(이를 미국에서는 렉(REQ:requisition)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채용 절차를 끝내버리곤 한다. 우리나라처럼 기간 내에 어떻게든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기준에 조금 모자라도 누군가를 채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전문가를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전문가를 찾기 때문이고, 따라서 인터뷰 과정이 매우 까다롭고 심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실리콘 밸리의 기업은 전문분야에 따라 업무를 분장하고 이에 따라 인력을 채용한다. 따라서 개발자들은 경력을 쌓으면 쌓을수록 자연스럽게 해당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나게 된다. 수시로 이직을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직무를 계속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업계에서 보낸 연차가 고스란히 자신의 경력이 되고 그대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한국에서는 T자형, 즉 직무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는 통섭형 인간을 바람직한 인재상으로 꼽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이곳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직의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역과 잘 융합할 수 있는 넓은 시야, 응용 능력, 그리고 타 분야 인사들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관리자로서 조직을 이끌어 성과를 내고 조직이나 그룹의 정점일 찍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T자형 인재가 되는 것은 국적을 불문하고 어디서나 지향해야 할 목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T자형 인재가 되기 위한 선결조건은 우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직을 원한다면 그동안 가꾸어 왔던 자신의 경력을 통해 최소 한 분야의 전문가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와 언어 장벽을 뛰어넘어 실리콘 밸리로 진입하기 위한 일차 필요조건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근무 중인 한인들은 크게 세 가지 경로를 통해 미국으로 진출하곤 한다. 1) 미국 유학 후 취업, 2) 국내 외국계 지사 근무 중 본사로 트랜스퍼, 3) 한국에서 경력직으로 직접 이직하는 경우다. 유학이나 트랜스퍼는 그 기회의 문이 좁다. 학부 졸업 후 대학원 유학을 가는 것도 재정적 능력과 개인 사정에 달려 있다. 외국계 지사에 근무하더라도 본사로 트랜스퍼하는 기회도 흔치 않다. 따라서, 본인만의 노력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경로는 "한국에서의 경력만으로 직접 이직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 '경력'은 실리콘 밸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관리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개발자나 엔지니어가 미국에서처럼 일관성 있는 경력을 쌓기가 쉽지 않다. 이는 채용, 조직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한국 대기업은 '공채'라는 과정을 통해 대규모로 신입사원을 채용한 뒤 재교육을 통해 필요 인력을 양성하곤 한다. 따라서, 개인의 전문성보다는 조직의 당면한 목표, 프로젝트 사정에 따라 개개인의 담당업무가 결정된다.
또한, 성과에 대한 조급한 문화 때문에 잦은 조직개편도 일어난다. 이때 조직원들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혀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관리자와 실무자 트랙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실무자가 연차가 쌓이면 관리자로 직무를 바꿔야 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러한 양국의 환경 차이가 한국의 경력자로 하여금 미국 회사로 직접 이직을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업계에서의 경력에 일관성이 없다면 전문가로 인정받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의 꿈이 언젠가 실리콘 밸리에서 실무자로 근무하는 것이라면 우선 이들의 업무 방식과 채용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일찍부터 (가능한 업계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계획을 세워 장기간 목표로 경력 관리를 할 필요가 있다. 같은 업계 경력 10년이라도 관리하느냐 않으냐의 차이는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문성을 높이는 (또는 최소한 높아 보이게라도 할 수 있는) 이력을 가꿀 수 있을까? 나는 업계에서 경력을 쌓아갈 때 우선 두 가지를 유념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첫째, 경력경로(career path)에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개발자나 연구원으로 다년간의 경력을 쌓다 보면 필히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그 결과가 내 이력서의 한 줄, 한 줄이 된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다양한 스킬 셋을 쌓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10년의 경력이라도 A, B, C 분야 등 연관 없는 다른 분야를 몇 년씩 나눠서 진행한 것보다, A 분야를 10년 동안 해 온 이력이 실리콘 밸리에서는 더 선호된다. 내가 쌓아온 경험이 큰 틀에서라도 한 분야로 묶일 수 있어야 최소한 '전문가'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국에서 이렇게 경력관리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경우, 한 분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자신의 경력의 길을 지켜야 한다. 단순 호기심이나 시류에 휩쓸려 이것저것 얇게 경험해 보는 것보다, 가능한 한 분야 내에서 깊은 내공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두 개의 기술적 키워드로 자신을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실리콘 밸리에 내미는 도전장에는 나를 대표하는 이 키워드가 적혀 있어야 한다.
둘째, 경력은 일반화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이 그대로 다른 회사에서도 활용될 수 있으려면, 해당 업계에서 보편적으로 통용 가능한 업무를 맡아야 한다. 리더십, 조직관리, 소통, 대인관계 등 소위 '소프트 스킬'은 일면 타고나는 것도 있고 한번 갖추면 이직 후에도 십분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개발자나 연구원이 각고의 노력으로 쌓은 '기술력'은 이직 후 꽃을 피울 수도 그대로 사장되어 버릴 수도 있다.
만일 현재 업무가 현재 회사에서만 사용되는 플랫폼에서만 국한되고 개발 툴도 사내용이라면 어떨까. 해당 업무를 통해 쌓은 스킬 셋은 이직시 인정받을 확률은 희박해진다. 물론, 이런 경우라도 배우는 것은 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알려진 지식과 스킬 셋, 그리고 참여 프로젝트가 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경우라면, 자신의 이력서에 적혀있는 프로젝트 경험, 스킬 셋은 더 빛을 발할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한 범용적인, 글로벌 업계에서 통용되는 스킬 셋을 쌓아야 한다. 또한, 향후 대외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는 과제에 참여해 자신의 경력이 일반화될 수 있도록 늘 고민해야 한다.
사실 한국에서 실리콘 밸리로 진입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은 이외에도 무척이나 많다. 기술적 역량 외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 신분 (비자) 문제, 커뮤니케이션 스킬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이 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차적으로 '전문성'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는 다른 조건들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통해 갖출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업계에서 경력을 쌓을 때, 보다 전략적인 사고로 접근을 해야한다.
미국의 코비드가 끝나가면서 최근 부쩍 한국에서 미국으로 새롭게 건너오는 분들을 뵙게 된다. 그들은 모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실리콘 밸리 진입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고민, 자녀 교육, 환경적 요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으로의 이직을 선택했다. 그들에게서 5년 전의 내 모습을 투영하면서, 나의 과거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정답을 내릴 수 없다. 우리가 인생을 걸쳐서 내리는 선택은 가치중립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택지 각각의 장단점이 극명하다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를 할 때 '커넥팅 더 닷'(Connecting the Dots)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생은 내가 내린 '선택'이라는 점(dot)들로 구성되고, 우리는 앞을 내다보며 미래의 점들을 연결하지 못하지만 대신 뒤를 돌아보며 과거의 점들을 연결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만일 현재 당신이 눈이 실리콘 밸리를 향하고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두드리기 바란다. 과정은 쉽지만은 않을지라도 경력을 일관성 있게 그리고 일반화시키며 준비해 간다면 언젠가 그 문은 열릴 것이다. 그 기회가 당신이 걸어왔던 과거의 점들을 관통하는 새로운 한 방점이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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