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자유의 작은 형식이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카페의 프리덤

그리스인 조르바(2009)


“나는 자유다”라는 엄격한 문장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의 묘비명으로 널리 알려진 문장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짧고 강렬한 문장이어서 흔히 자유를 찬양하는 선언처럼 읽히지만, 조금 오래 들여다보면 이 말이 가리키는 자유는 생각보다 훨씬 엄격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에게 욕망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 역시 위험과 불안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기보다 두려움이 자신의 삶을 대신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의 “나는 자유다”라는 문장은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편안한 상태라기보다,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포함한 삶 전체를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결심에 더 가까워진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서 자유는 갈등이 사라진 평온한 상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 욕망과 절제, 신과 인간, 고향과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그 충돌을 없애는 대신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한다. 자유는 갈등에서 빠져나가는 출구가 아니라 갈등을 통과하면서도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인 셈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이 문제는 두 인물의 대비를 통해 선명하게 나타난다. 화자는 바카라과 사유를 통해 삶을 이해하려 하고, 조르바는 일하고 먹고 사랑하고 실패하며 몸과 경험으로 삶을 받아들인다. 한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려 하지만, 조르바는 먼저 삶 속으로 들어간 뒤 그 안에서 자신의 답을 찾아간다.

조르바는 자유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를 단순한 충동이나 방종으로 이해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조르바가 자유롭게 보이는 것은 삶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슬픔, 욕망과 실패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기쁨이 찾아오면 충분히 기뻐하고, 슬픔이 닥치면 그것을 외면하지 않으며, 실패한 뒤에도 실패를 삶 전체의 결론으로 만들지 않고 다시 움직인다.

그에게 자유는 고통이 없는 삶이라기보다 고통이 찾아왔을 때도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 리듬을 완전히 잃지 않는 능력에 가깝다.

나는 이 지점에서 커피와 카페를 생각한다.


자유에는 형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유를 흔히 규칙의 반대편에 놓는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정해진 형식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오랜 시간 형식을 익혀온 경우가 많다. 재즈 연주자가 즉흥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화성과 리듬, 악기의 구조를 충분히 알아야 하고, 작가가 문장을 자유롭게 변주하려면 언어의 문법과 리듬을 몸에 익혀야 한다. 무용수의 자유로운 움직임 역시 수없이 반복한 기본동작과 몸의 균형 위에서 가능하다.

커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바리스타가 한 잔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려면 먼저 물과 커피의 비율, 분쇄도와 온도, 추출시간과 유속, 원두의 특성과 로스팅의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로스터 역시 열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두의 밀도와 수분, 가공방식과 저장상태, 로스팅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읽으면서 에너지와 시간을 조절한다.

규칙을 모르면서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자유로운 해석이라기보다 우연에 가까울 수 있다.

좋은 기술에서 자유는 규칙을 버리는 순간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왜 필요한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상황에 따라 그것을 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카페도 마찬가지다. 손님에게 자유로운 시간을 제공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공간이 좋은 카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명과 음악, 테이블 사이의 간격과 동선, 메뉴의 수와 좌석의 성격 같은 요소가 세심하게 조정되어 있을수록 사람은 공간의 존재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방식으로 머물 수 있다.

음악이 너무 크면 대화를 선택할 자유가 줄어들고, 테이블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우면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의 시간이 쉽게 침범받는다. 메뉴가 지나치게 복잡하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결정해야 할 일을 하나 더 만들어낼 수 있다.

잘 설계된 카페의 자유는 방치에서 나오지 않는다. 운영자가 필요한 질서를 충분히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와 형식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좋은 형식은 인간의 움직임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선택과 간섭을 줄여 더 넓은 자유를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조르바의 자유는 몸에서 시작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흥미로운 점은 자유가 머릿속의 개념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조르바는 삶을 철학적으로 정리한 뒤에 행동하지 않고, 먼저 몸으로 살아낸 뒤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노동할 때는 노동하고, 먹을 때는 먹으며, 사랑할 때는 사랑하고, 슬픔이 찾아오면 슬픔까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에게 몸은 정신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통로다.

현대인은 오히려 반대의 상황에 놓일 때가 많다.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아차리기 전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실제로 배가 고픈지보다 식사시간이 되었는지를 먼저 살피며, 피곤해도 일정이 남아 있으면 계속 움직인다. 업무와 약속, 알림과 마감이 하루의 속도를 결정하면서 몸의 감각은 자주 뒤로 밀려난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짧은 시간에는 이 관계가 잠시 달라질 수 있다.

잔을 들어 향을 맡고, 손에 닿는 온도를 느끼며, 첫 모금을 천천히 삼키는 동안 우리는 다시 자신의 감각으로 돌아온다. 산미가 밝게 느껴지는지, 단맛이 얼마나 남는지, 질감이 편안한지, 지금 내가 이 커피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경험이다.

물론 커피 한 잔이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이 될 것이다. 커피를 마신다고 온라인 게임의 의무가 사라지거나 인간관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루 가운데 몇 분이라도 자신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무엇인가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한 잔을 천천히 마시는 동안만큼은 잠시 무엇인가를 느끼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

조르바의 자유가 몸을 통해 삶을 받아들이는 자유라면, 한 잔의 커피가 제공하는 작은 자유 역시 감각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카페는 자유의 임시 영토다


카페는 집도 아니고 온라인 게임도 아니다. 집에서는 가족의 역할과 생활의 바카라임이 따라오고, 온라인 게임에서는 업무와 성과가 요구되지만 카페에서는 잠시 그 둘 사이에 머물 수 있다.

혼자 있으면서도 완전히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반드시 그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바카라을 읽고, 누군가는 노트북을 펴놓고 일을 하며, 두 사람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또 다른 사람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이 카페의 독특한 성격이다.

나는 그래서 카페를 자유의 임시 영토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자유에도 경계는 있다. 영업시간이 있고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시간을 침해하지 않기 위한 기본적인 규칙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조건 안에서 무엇을 마실지, 어디에 앉을지, 누구와 이야기할지, 혼자 있을지, 얼마나 머물지 같은 문제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카페가 해야 할 일은 이 선택을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많은 메시지와 장식으로 시선을 붙잡기보다 자신의 생각에 머물 수 있는 여백을 만들고, 음악과 조명을 공간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 사람의 활동을 자연스럽게 받쳐주는 배경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공간설계는 단순한 미학의 문제를 넘어 자유의 문제와 연결된다.

어떤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그 안에서 어떤 행동이 자연스럽게 가능하고, 무엇은 어렵거나 불편해지는지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페의 의자 하나, 테이블 사이의 간격, 음악의 볼륨과 조명의 밝기까지 사람의 행동을 조금씩 유도한다. 좋은 공간은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종류의 시간이 가능하도록 조건을 열어둔다.


쓴맛이 있는 자유


자유는 매력적인 단어지만 실제로 자유로운 삶에는 꽤 많은 불편함이 따른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선택의 결과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고, 다른 사람이 정해준 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방향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독립에는 외로움이 따라올 수 있고 자기 길을 택하면 실패의 가능성 역시 가까이 존재한다.

조르바의 자유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고통과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도 삶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다. 상처를 받았다고 삶을 멀리하지 않고, 실패를 경험했다고 자신의 생 전체를 하나의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자유는 고통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고통이 삶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하는 태도에 가깝다.

커피의 쓴맛을 인간의 고통에 직접 대응시키는 것은 조심해야 하지만, 좋은 커피를 마시면서 비슷한 구조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커피의 매력은 단맛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고, 산미와 단맛, 쓴맛과 향, 질감이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면서 한 잔 안에서 관계를 만들 때 깊이가 생긴다.

어떤 감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이 다른 요소와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가 더 중요하다.

인간의 삶에서도 자유는 불안과 바카라임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 더 가깝다.

그렇게 보면 자유란 불편함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불편함이 자신의 삶 전체를 대신 결정하지 못하도록 할 만큼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커피를 배우는 이유


커피를 오래 공부하다 보면 점점 더 많은 기준과 언어를 만나게 된다. 산지와 품종, 가공방식, 수분과 밀도, 로스팅 프로파일과 추출변수, 향미의 표현과 관능평가의 기준까지 처음 커피를 마실 때는 몰라도 되었던 것들을 하나씩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공부는 분명 필요하다. 기준이 없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기 어렵고, 원하는 결과를 반복하거나 문제를 개선하기도 어렵다. 경험을 지식으로 축적하기 위해서는 숫자와 언어, 비교와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커피를 공부할수록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도 생긴다.

지식이 감각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감각보다 먼저 결론을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어느 산지의 커피이므로 이런 맛이 나야 한다고 미리 판단하고, 특정 품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높은 가치를 기대하며, 점수와 용어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실제 커피보다 중요해진다면 공부는 오히려 감각을 좁힐 수 있다.

좋은 공부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지를 배우는 것은 답을 미리 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커피가 만들어지는 세계를 더 넓게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추출을 공부하는 것은 한 잔을 공식 안에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가능성을 안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향미의 언어를 익히는 이유 역시 다른 사람의 정답을 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느낀 것을 더 정확하게 구별하고 말하기 위해서다.

커피를 안다는 것은 커피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조절할 수 있고, 무엇은 재료와 환경의 차이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지식은 권위가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넓히는 도구가 된다.


좋은 카페가 제공해야 할 프리덤


좋은 카페가 손님에게 제공해야 할 자유는 단순히 오래 앉아 있어도 된다는 편안함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그것을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많은 공간은 사람에게 분명한 역할을 요구한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생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쇼핑몰에서는 소비자가 되며, 온라인에서는 끊임없이 반응하고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기 쉽다.

카페에서는 그 역할에서 잠시 거리를 둘 수 있다.

바카라을 읽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다. 같은 공간 안에서도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카페가 가진 중요한 가능성이다.

좋은 카페는 이 가운데 특정한 한 가지 모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런 태도가 없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어떤 커피를 선택하고, 어떤 음악을 틀며, 어느 정도의 밝기와 좌석 간격을 두는지는 결국 그 카페가 어떤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좋은 카페의 철학은 손님에게 행동을 명령하기보다 그 공간에서 가능한 시간의 폭을 넓혀주는 방식으로 드러나야 한다.

커피를 진지하게 다룬다고 해서 모든 손님에게 긴 설명을 듣도록 요구할 필요는 없고, 바카라을 많이 두었다고 반드시 독서를 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들 필요도 없다. 조용한 공간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숨을 죽여야 할 정도의 긴장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운영자의 철학은 분명하되 그 철학이 손님의 시간을 지배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좋은 공간의 자유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세심하게 준비해 두고도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자유는 거대한 사건으로만 오지 않는다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자유는 인간 존재 전체를 향한 거대한 질문이지만, 실제 우리의 삶에서 자유는 언제나 극적인 사건으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거나 낯선 도시로 떠나는 일처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도 자유의 문제이지만, 오늘 하루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자신의 감각으로 돌아오는 일 역시 작은 자유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다른 사람과 시스템이 정해놓은 속도로 살아간다. 출근시간과 회의시간, 업무의 마감과 메시지, 관계의 기대와 시장의 속도가 하루를 잘게 나누고,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잠시 잊게 된다.

그런 날 커피 한 잔이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다.

몇 분 동안 멈추고 잔의 온도를 느끼며 향을 맡고, 한 모금 마신 뒤 지금의 맛이 자신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 생각하는 정도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자신의 감각을 다시 확인하고 하루의 속도를 잠시 자신의 쪽으로 가져오는 시간이 될 수는 있다.

자유가 모든 바카라임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태까지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커피 한 잔은 그런 자유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고, 그렇기 때문에 매일 반복할 수 있다.


한 잔의 프리덤


『그리스인 조르바』가 보여주는 자유는 삶에서 도망치는 자유가 아니다. 조르바는 실패와 기쁨, 욕망과 슬픔을 모두 지나면서도 끝내 삶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자신에게 닥치는 현실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어도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지는 스스로 선택하려 한다.

나는 이 태도가 카페와 커피가 제공할 수 있는 작은 자유와도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카페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커피 한 잔이 인간을 근본적인 의미에서 해방시키는 것도 아니지만, 도시의 속도 안에서 잠시 자신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자유가 가능하려면 역설적으로 꽤 많은 준비와 질서가 필요하다.

한 잔의 커피 뒤에는 생산자의 노동과 로스터의 판단, 바리스타의 반복된 훈련이 있고,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카페 뒤에는 조명과 음악, 좌석과 동선, 서비스의 거리를 조정한 운영자의 선택이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고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실 그 뒤에서 수많은 요소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커피의 자유는 무질서와는 오히려 반대편에 있다.

충분한 형식을 통과한 뒤에 생기는 여유이고, 기술을 익힌 뒤에 가능해지는 해석이며, 운영자가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그 안에서 자기 방식대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는 태도다.

카잔차키스의 “나는 자유다”라는 문장이 인간 존재의 거대한 자유를 말한다면, 커피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훨씬 작고 일상적인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반드시 거대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잔을 앞에 두고 잠시 남의 속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호흡으로 돌아오는 몇 분,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 그리고 그렇게 짧게 멈춘 뒤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작은 간격 역시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자유의 작은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커피가 자유를 설명해 주는 음료이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형식과 질서 속에서 잠시나마 자신의 시간과 감각, 리듬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일상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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