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답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먼저다
나는 소를 키우는 집에 시집을 갔다. 농사를 짓는 분들은 나에게 부잣집에 시집갔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혼자 귀농해서 살던 나는 이미 현실을 안다. 시골 부자는 일 부자다. 고로 나도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다.
시집을 와서 축사에서 소 밥을 주기 시작했다. 첫 해는 시키는 대로 소 밥을 줬다. 두 번째 해에는 시부모님까지 온 가족이 하루도 못 쉬고, 체감온도 38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 땡볕에도 일을 하는데 왜 먹고살기 빠듯하지?라는 궁금증을 품었다. 세 번째 해에는 우리 집 농장이 어떻게 경영되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경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시부모님과 얽혀 있어 내가 개선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1년을 고민했다. 소들 사료값이라도 줄여보자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로 국제 곡물가가 뛰면서 소를 키우는 데 드는 경비가 눈에 띄게 늘었다. 여기에 최근 중동 정세 불안과 고공행진하는 원달러 환율까지 겹치면서 90% 넘게 수입에 의존하는 사료값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그래서 남편이 직접 소 사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kg당 650원이 넘어가던 사료값을 300원대로 낮추겠다는 도전이었다.
남편은 10년 넘게 소를 키우며 쌓아온 전문지식이 꽤 많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라는 대로 소 밥을 주는 일꾼이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똑똑한 전문가를 소개했다. Gemini와 GPT다.
내가 대규모 언어모델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남편은 사료 배합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 소들의 상태에 맞춰 충분한 영양성분을 공급할 수 있는 사료를 만들기 위해 남편은 밤마다 Gemini를 켰다. 하지만 남편은 Gemini의 답을 선뜻 믿지 못했다. 아무리 똑똑한 AI라 해도 그 배합비대로 사료를 만들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만든 사료는 소들에게 최소 한 달은 먹여봐야 하는데 비용이 천만 원 단위였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밤마다 배합비만 연구하던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평창에 있는 축산물품질평가원 연구원을 소개받았다. 그분께 그간 연구한 자료와 우리 집 소들의 정보를 전달했고, 몇 차례 만남 끝에 배합비를 추천받았다. 남편은 연구원이 제시한 배합비대로 사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Gemini가 처음 답해준 배합비와 연구원이 제시한 배합비가 얼마나 다른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세상의 모든 정보를 학습한 AI보다 축산물품질평가원 연구원의 말 한마디를 훨씬 더 믿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올해 4월, 캐나다 겔프대학교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Q Open에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농업 현장에서 쓰이는 대화형 AI를 농업인과 농업지도사가 받아들이는 과정을 분석한 연구다. 세계 각국의 실증 연구 587건을 훑어서 최종 12편만 추려냈는데, 여기서 나온 결론이 꽤 뼈를 때린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쓰는 사람이 '이걸 믿어도 되나?'라고 느끼는 순간, 소용없다는 것.
연구팀은 이 '믿어도 되나?'의 구조를 3가지로 나눠 봤다. 첫째, 우리 마을 사정에 맞는 답인가. 둘째, 정부나 공공기관이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가. 셋째, 실제로 써봤더니 도움이 되는가. 이 세 가지가 겹쳐야 비로소 기술이 현장에 안착한다. AI의 성능이 아무리 높아도 내 밭의 토양이나 우리 마을의 날씨를 모르는 답이라면, 그건 잘 만든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남편이 밤새 고민한 Gemnini 배합비를 선뜻 믿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12편에서 가장 자주 지적된 문제도 속도나 정확도가 아니라 '그럴듯하게 틀린 답'이었다. 파종량이나 파종 시기를 잘못 안내하거나 토양 검사에 대해 부정확한 조언을 주는 식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진행된 한 연구에서는 벼 재배 관련 챗봇 조언의 정확성이 상당 부분 의심스럽다는 결과가 나왔다. 전문가는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오류일지라도 농업인이 판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 문제는 그 틀린 답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 우리 농처럼 천만 원의 손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불편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분석된 12편에 사용된 AI 모델 대부분이 OpenAI, Meta, Google에서 나왔다. 농업 데이터를 다루는 도구인데, 정작 어떤 데이터로 만들어졌고 어떤 원칙으로 작동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 도구를 현장에 들이면서 "믿고 쓰세요"라고 하기엔, 농업 데이터는 생계와 직결되는 정보다. 연구팀도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 데이터는 누구의 것이며, 실패했을 때 그 결과는 누가 바카라임지는가.
그렇다면 대화형 AI가 농업 현장에 도입되면 농업지도사는 필요 없어지는 걸까? 이 논문의 가장 날카로운 통찰이 여기 있다. 오히려 반대라고 한다. 연구팀은 농업지도사가 챗봇의 답을 현지 맥락에 맞게 다시 풀어주고, 틀린 부분을 걸러내고, 농업인의 질문 우선순위를 정리해 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봤다. 챗봇의 '배달부'가 아니라 '검증자'이자 '통역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농장으로 치면 평창의 연구원이 딱 그 역할이었다. 남편이 Gemini로 밤새 연구한 자료를 가져갔을 때, 연구원은 그 데이터를 우리 집 소들의 실제 상태에 맞게 걸러주고 다시 해석해 줬다. AI가 사람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 바뀌는 것이다.
물론 이 결론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가져오기는 조심스럽다. 12편의 연구 대부분이 중국, 브라질, 나이지리아, 우간다 등의 사례였고, 농업인 본인의 목소리보다는 농업지도사나 전문가 관점에서 분석된 경우가 많았다. 저자들도 이 점을 한계로 인정한다. 우리나라는 농축협과 농업기술센터라는 촘촘한 신뢰망이 이미 있다. AI 챗봇이 이 안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도, 반대로 기존 체계와 부딪히며 늦어질 수도 있다.
그럼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농업기술센터나 농축협이라면 챗봇 하나를 더 만드는 일보다, 농업지도사들이 AI의 답을 검증하고 농업인에게 다시 설명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게 먼저다. 농업 AI 스타트업이라면 정확도를 높이는 기술보다는 어떤 데이터를 누구와 함께 만들었는지 투명하게 밝히는 편이 현장의 문을 여는 더 빠른 길이다. 스마트농업의 다음 단계는 더 똑똑한 모델이 아니라, 그 모델의 답을 현장에서 걸러줄 사람을 키우는 데서 시작한다.
남편은 지금도 밤이면 Gemini를 켠다. 다만 이제는 AI의 답변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AI가 제시해 준 사료 배합비를 들고 연구원을 찾아간다. 그렇게 연구원의 조언을 듣고 배합비를 조정해서 농장에 반영한다. 결국 소 먹이를 결정하는 일은 AI도 연구원도 아니다.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우리 소들을 제일 잘 아는 사람, 남편이다.
P.S.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신뢰하는 농업지도사가 검증까지 해주는데도, 끝내 AI를 받아들이지 않는 농업인들이 있다. 왜일까. 다음 편에서는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