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겨울을 묻고, 오로라를 입다

최진영의 <오로라>

by옫아

올해 읽은 바카라 중 가장 긴 여운이 발끝까지 남는 작품을 만났습니다.

제주의 서늘한 겨울바람을 닮아, 지금처럼 찬 기운이 남아있는 계절에 읽으면 그 온기와 냉기가 더 선명하게 파고드는 소설,

최진영 작가의 《오로라》입니다.

이 글은 소설의 핵심적인 결말과 주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나의 진심이 누군가에겐 '불법'이 되고,

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의 이름을 빌려 입어야 했던 한 여자의 기록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죽은 새를 묻고 그 자리에 나란히 서게 된 두 개의 눈사람,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빛나던 오로라라는 이름의 의미를 깊게 들여다본 에세이를 공유합니다.




사랑이 불법이 되는 순간이 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뛰어든 범죄는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숨을 쉬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금지된 구역 안에 서 있었다.





최진영의 소설 《오로라》 속 유진이 제주로 떠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망이 아니라, 숨을 쉬기 위해 숨어야만 하는 역설적인 선택.

그곳에서 나는 나를 ‘너’라고 부르며 타자화하고, 낯선 풍경 속에 나를 묻기 시작한다.



제주의 겨울바람을 타고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죽은 새였다.


발코니에 툭 떨어져 나는 법을 잊어버린 존재.


세상의 규칙은 냉정하다. 죽은 새를 땅에 묻는 것은 불법이고, 규격 봉투에 담아 쓰레기와 함께 버리는 것이 합법이란다.


사랑도 그랬다.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비행이었을 나의 진심이, 세상의 법망 안에서는 처분해야 할 오물이나 흔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진심을 쓰레기 봉투에 담지 못한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어두운 밤, 관리인의 오토바이 뒤에 실려 이름 모를 땅을 파헤친다.

내 안에서 죽어버린, 혹은 죽여버린 누군가를 기어이 묻어주려는 마음.

그것은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랑을 향한 마지막 예우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변화는 그 무덤 위에서 시작된다. 비극의 장소였을 그 땅 위로, 이제 눈사람이 선다.

눈사람은 사람을 전혀 닮지 않았고, 언젠가 녹아 사라질 운명을 타고났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서 돌담 위에 나란히 생겨난 두 개의 눈사람은 이전의 이기적인 믿음과는 결이 다르다.


"나를 배반하지 말라"는 서글픈 요구가 아니라,

아무도 그 진의를 따지지 않는 '순전한 믿음'의 형상이다.


새를 함께 묻어주었던 관리인과 나눈 그 묘한 유대감이, 차가운 눈덩이를 굴려 서로를 마주 보게 만든 것이다. 해가 뜨면 사라질 덧없는 존재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란히 서 있는 두 형상은 차가운 겨울 끝에 찾아온 아주 작은 희망의 싹과 같다.



유진은 이제 자신을 오로라라고 부르며 그 비현실적인 빛의 이름을 입는다.

오로라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이름이자, 동시에 내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타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름을 빌려 입고 제주에서 보낸 한 달은 기만이 아니라 치유였다.

서울에서의 '최유진'이 가졌던 규칙과 상처를 땅에 묻고,

'오로라' 혹은 또 다른 이름으로 낯선 이와 눈사람을 만드는 시간.

그 과정 속에서 유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타인처럼 객관적으로,

그러나 따뜻하게 바라볼 여지를 발견한다.


끊임없이 울리던 전화를 마침내 받아

"다신 나를 찾지 마"라고 말하는 유진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의 죽은 사랑을 비로소 합법적으로 보내주는 장례 절차다.

그리고 그 장례가 끝난 자리에, 관리인과 함께 만든 눈사람이 남았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눈을 굴리는 마음,

불법인 줄 알면서도 생명을 묻어주는 온기.


유진은 이제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제주의 돌담 위에 세워진 두 개의 눈사람처럼,

비록 내일이면 녹아 없어질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마주 봄이 주는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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