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체화한 이들이 선택한 지독한 사랑론
정대건의 소설 <급류>는 제목 그대로 거칠고 위험하게 휘몰아치는 감정과 사건의 물살을 다룬다.
저수지와 계곡이 유명한 가상의 도시 ‘진평’을 배경으로,
열일곱 살의 도담과 해솔이 겪는 첫사랑은 찬란한 낭만보다는
비릿한 물비린내와 예기치 못한 사고의 소용돌이에 가깝다.
이 작품은 유년의 비극이 어떻게 한 인간의 신체와 영혼에 박히는지,
그리고 그 상처를 ‘체화’한 이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재정립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소설은 상처가 단순히 기억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프게 묘사한다.
도담과 해솔에게 그날 밤의 사고는 잊히는 과거가 아니라, 근육의 떨림과 불면, 혹은 이유 없는 호흡 곤란 같은 형태로 몸 구석구석에 각인된다. 누군가는 죄바카라감에 스스로를 가두고, 누군가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서늘한 감각으로 평생을 절뚝거린다.
상처가 체화된다는 것은 이처럼 나의 성격과 생활 양식,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근간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재회한 두 사람이 서로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유는, 서로의 얼굴이 곧 각자가 가진 가장 깊은 흉터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비극을 넘어 눈부신 성장담이 되는 지점은, 수동적인 ‘빠짐’에서 능동적인 ‘잠수’로 전환되는 찰나에 있다. 소설 속에는 “소용돌이에 빠지면 수면으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조언이 등장한다. 이는 고통을 외면하며 허우적거리는 대신, 그 비극의 실체를 온전히 마주하고 바닥을 발로 차고 올라와야 한다는 생존의 법칙이다.
극의 말미, 도담이 내뱉는 “난 빠진 게 아니라 사랑하기로 내가 선택한 거야”라는 선언은 이 작품의 백미다.
사랑을 어쩔 수 없이 닥친 재난이나 사고로 두지 않고,
그 고통과 결과까지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주체적인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체성은 두 주인공의 직업적 귀결에서 가장 숭고하게 완성된다.
유년 시절 죄바카라감을 이기지 못해 자해를 일삼으며 자신의 몸을 파괴하던 도담은, 타인의 부서진 몸을 어루만지고 회복을 돕는 물리치료사가 된다.
반면, 차가운 물속에서 엄마와 아저씨를 구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짓눌려 살던 소년 해솔은,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뜨거운 불길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소방관이 된다. 죽음의 공포가 서린 물가에서 떨던 아이가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구원자가 된 것이다. 이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박제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흉터를 동력 삼아 타인의 생을 붙잡겠다는 지독하게도 용감한 선택이다.
결국 <급류>는 사랑이 얼마나 달콤한지가 아니라,
사랑이 얼마나 깊고 거센 물살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상처에 흠뻑 젖은 이들이 각자의 몸을 말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바닥까지 잠수해 본 사람만이 소용돌이를 빠져나갈 길을 안다.
도담과 해솔이 마주한 사랑은 순정한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고통과 후회, 애처로움이 켜켜이 쌓인 단단한 퇴적암과 같다.
비극적인 과거를 현재의 살림으로 치환해낸 이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을 덮친 급류 앞에서 떠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그 물살의 방향을 직접 결정할 것인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이들에게,
이제 더 이상 거센 물살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 헤엄쳐 나갈 찬란한 생명력의 현장이 된다.
덧) 이름의 역설과 가상 캐스팅
소설 속 ‘도담’과 ‘해솔’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통과한 비극과 맞닿아 있다.
‘도담’은 탈 없이 자라길 바라는 이름의 뜻과 달리, 상처로 얼룩진 유년을 보낸 뒤에야 타인의 회복을 돕는 물리치료사가 되었다. ‘해솔’ 또한 어두운 수중 와류에 갇혔던 소년이 마침내 불길을 뚫고 타인을 비추는 빛(해)과 단단한 나무(솔) 같은 소방관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이름이다.
영상화가 된다면 상처를 ‘체화’한 이들의 서늘하고도 묵직한 분위기를 담아낼 배우들이 필요할 것 같다. 가상캐스팅을 살짝 해보자면, 특유의 맑으면서도 날 선 마스크를 가진 배우 김다미는 도담의 예민함과 차분한 물리치료사의 분위기를 구현할 적임자가 아닐까?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 절제된 연기에 탁월한 배우 이도현은 죄바카라감을 동력 삼아 사지로 뛰어드는 소방관 해솔의 묵직함과 애틋한 눈빛을 가장 깊이 있게 담아낼 것으로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