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서로의 꽃이 된다.

언어의 무게 소설 명대사

by볕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누군가의 삶에서 어떤 사람이었을까.
잠시 스쳐 지나간 계절이었을까.
아니면 아주 잠깐 피었다가 사라졌지만 오래 향기로 남아 있는 작은 꽃 한 송이였을까. 아님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흔이었을까.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봄처럼 다가오고, 어떤 사람은 긴 장마처럼 눅눅해진다. 또 어떤 사람은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의 계절 밖으로 걸어 나가기도 한다.
예전에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상대의 마음을 모두 아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아파했는지 전부 알아야만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짧았다고 느껴진다.
사람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떠올리는 기억이 다르고, 같은 상처를 겪어도 아파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울음으로 슬픔을 흘려보내고, 어떤 사람은 웃음 뒤에 마음을 숨긴다. 또 어떤 사람은 끝내 말하지 못한 채 혼자 견디기도 한다.
그래서 이해란 어쩌면 상대를 완벽히 아는 일이 아니라, 끝내 알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어의 무게》 속 문장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서로의 고독을 존중하며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이 문장을 읽고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타인의 고독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고독 앞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켜줄 수는 있다. “왜 그래?” 대신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말할 수 있고, 함부로 단정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의 침묵 옆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사람은 거창한 위로보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나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누군가의 고독과 고통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멀어졌는지, 왜 침묵했는지 쉽게 결론 내리지 않으려 한다. 그 사람에게도 나름의 상처가 있었을 테고,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보려 한다.
그것이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예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별에 대한 예의는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상대방 마음을 보는데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꽃도 가장 환하게 피어 있을 때만 꽃은 아니다.
비를 맞는 시간도 꽃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시간도 꽃이다. 꽃잎을 조금씩 잃어가면서도 끝내 제 자리를 지키는 시간까지 모두 꽃이다.
사람도 그렇다.


환하게 웃는 모습만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견뎌낸 밤도, 삼켜낸 눈물도, 말하지 못한 외로움도 모두 그 사람이다.
사람을 대할 때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너는 타인의 고통이나 고독을 이해하는 존재인가?
여전히 찌질하고 미성숙하고 이타적인 자신이지만 사람의 인연을 꽃이라 믿어보고 싶다.
오래전 무심히 건넨 안부 한마디가, 말없이 곁을 지켜준 하루가, 조용히 들어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긴 겨울 끝에 도착한 작은 봄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이름 모를 들꽃처럼 조용히 피어, 누군가의 마음 한구석을 오래 밝혀주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서로의 꽃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