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다 내려놓으니 배가 고파졌다.

by볕뉘

어렸을 적 미술 시간은 늘 조금 무서웠다.


선생님께 “너는 크레파스나 붓을 들면 안 되겠다.”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였다.
그 말은 어린 마음에 생각보다 깊게 상처를 남겼고,
미술 시간이 다가오면 괜히 배가 아팠다. 정말 아픈 것인지, 아픈 척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자주 양호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미술 시간만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그림은 오래도록 내 삶 밖에 머물렀다.
좋아할 기회도 없이, 시도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리고 오십이 넘어 다시 연필을 들었다. 이번에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색연필로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지하게도 첫 수업 날 색연필을 한가득 챙겨 갔다.
당연히 색연필 그림을 배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첫 수업은 소묘였다.
평생 연필을 쥐고 살아왔는데도 그날의 연필은 낯설었다.
글을 쓰기 위해 잡던 연필과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고 그리고 담기 위해 잡는 연필은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글은 마음속에서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작업이라면, 그림은 바깥의 세계를 마음의 눈으로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90분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도, 결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함도 잠시 접어둔 체 종이와 연필, 그리고 눈앞의 대상만 바라보았다.
선을 긋고, 명암을 올리고, 지우개로 조금씩 지워가며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를 오래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밝은 곳도 어두운 곳도 전부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투시된 그림 안에서 이상하게 내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인정하자.
바닥을 치고 나니 조금은 알겠다.
사람은 생각보다 다양한 존재이며 이기적인

존재다. 특히 이별 앞에서 더 그렇다. 누군가는 회피로 조용히 멀어졌고, 누군가는 마음에 상처를 남긴 채 떠났지만 이 모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나만의 사람들이 걸러지고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 자라면서 사람과 헤어질 때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만남보다 더 잘해야 하는 것이 이별이라고 배웠다.
누군가의 모습에서 “아, 나는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를 배우듯이, 내 모습에서도 누군가는 무언가를 배우고 있을지 모른다.

나 자신에게 여지를 두고 싶어졌다. 무엇의 여지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여지를 두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살아간다. 이 거울을 투시하며 나만의 사람들을 찾는 과정이 삶에 숙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 내려놓고 나니 허기가 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진짜 배가 고파졌다.
그래서 요즘은 한 끼 한 끼를 정성스럽게 먹고 있다. 잘 먹는 일이 잘 사는 일이라는 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바쁘게 살아오느라 지나쳤던 마음들이 연필 끝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평생 글로 마음을 기록해 왔다면, 이제는 그림으로도 하루를 기록하는 삶을 살아 보고 싶다.
아주 서툴고 느리더라도 괜찮다.

예쁜 선 하나 못 긋는 날이 있어도 괜찮다.
명암이 엉망이 되어도 괜찮다.
어쩌면 그림은 잘 그리는 일이 아니라 있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붓을 들면 안 되겠다”는 말을 듣고 도망쳤던 아이는 이제 없다.


대신 오십이 넘어 다시 연필을 든 사람이 있다.
조금 느리고, 서툴지만 여전히 즐거움을 믿는 사람. 사람에게 상처받지만 사람만이 희망임을 믿는 사람이 앉아 있다.


언젠가 색연필로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캐릭터를 그리는 날을 기다리며 어릴 적 미술 시간의 나를 안아준다.
그리고 그 캐릭터가 어쩌면 지금의 나처럼, 조금 늦었지만 끝내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얼굴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