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으로 들어서는 기차의 육중한 울림에 설렘이 앞선다.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기차 특유의 냄새, 그 매캐하면서도 아련한 향수가 콧등을 스친다. 자리를 찾아 앉으니, 창밖의 풍경이 벌써 소란스럽다. 이상 기후 탓에 일주일이나 늑장을 부리던 봄꽃들이, 달리는 열차의 속도에 맞춰 서둘러 분홍빛 엽서를 그려내느라 분주하다.
오송역을 지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휙휙 지나치는 풍경 속에서 낯익은 지명들이 고개를 내민다. 고향 제천을 지나 단양으로 접어드는 순간, 박물관의 슬라이드 필름처럼 해묵은 기억들이 차창 위로 겹쳐 흐른다.
내 유년의 도화지를 가득 채웠던 것은 은빛 철길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 시멘트 공장 앞에서 상점을 하시던 친할머니댁에서 자란 내게 기차 소리는 가장 익숙한 자장가였다. 철길을 따라 키를 맞춘 맨드라미와 샐비어가 홧홧하게 줄을 서고, 그 사이사이 보랏빛 붓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던 풍경이 아직도 선연하다. 산업화의 고동 소리가 시멘트 가루처럼 자욱하던 시절이었지만, 내 기억 속 그 길은 세상에서 가장 화사한 꽃길이었다.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동네 언니들과 약속이라도 한 듯 철둑길 위로 올라갔다.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 가지를 꺾어 들고 가시를 조심조심 떼어내어 툭 꺾으면, 줄기 끝에서 발그레한 분홍빛 액이 배어 나왔다. 그 맑은 물을 찍어 손톱에 올리면 봉숭아 물보다 연하고 달콤한 향이 나던 분홍빛이 수줍게 번졌다. 대여섯 살의 나는 그렇게 찔레꽃 물든 손으로 화물열차의 칸수를 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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