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미국 온라인 게임은 모두 삼성역에 있었다

글라스타워, 아셈타워, 트레이드타워에서 보낸 세 번의 한국 출근

by예나빠


"저희 왔어요!"


거의 해마다 여름이면 아이들 방학에 맞춰 한국을 찾는다. 미국에 자식들을 보내놓고 기다리시는 양가 부모님과 일가친척을 뵙기 위해서다. 아이들을 앞세워 오랜만에 집에 들어갈 때면 반가움과 함께 늘 죄송한 마음이 든다.


모처럼 한국까지 왔는데 여름휴가 1~2주만 보내고 돌아가기에는 아쉽다. 그래서 휴가 앞뒤로 1~2주 정도 원격근무를 붙여 체류기간을 늘리곤 했다. 그러면 대략 한 달 정도 한국에서 여름을 보낼 수 있다. 다행히 미국에서 다녔던 세 회사 모두 이런 방식의 근무를 허락해줬다.


문제는 일할 장소였다. 본가나 처가에서 노트북을 펼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들이 오가는 집에서 하루 종일 회의를 하고 집중해서 일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인터넷 환경도 신경 쓰였고, 시차 때문에 이른 아침이나 늦은 시간까지 회의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하나 있었다. 같은 회사의 한국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미국에서 다녔던 세 회사의 한국 사무실은 모두 삼성역 근처에 있었다. 첫 회사는 글라스타워, 두 번째는 아셈타워, 지금 회사는 트레이드타워였다. 심지어 셋 다 고층이었다. 그래서 회사가 바뀔 때마다 나는 같은 동네를 다른 방향에서 내려다봤다. 미국에서 다닌 세 회사의 본사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출근지는 반경 몇백 미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본가가 삼성역과 매우 가까워 이 방법을 애용했다.


그런데 막상 세 회사의 한국 사무실 분위기는 묘하게 달랐다.



cb12468a-a9b7-4c71-b8bd-af6e4e49d1f5.png글라스타워에 위치한 첫 회사에서 본 풍경. (예나빠 촬영, 2020년).



'저... 미국에서 온 본사 직원인데요. 여기 혹시 출장자가 일할 만한 공간이 있을까요?'


엄밀히 말해 공무로 방문한 출장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현지에서 업무를 보려는 직원'이라 길게 설명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그것이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짧게 '출장자'로 퉁쳤다.


그렇게 첫 회사의 한국 사무실을 처음 찾은 건 2020년. 외국계 기업의 한국 사무실을 가본 적이 없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방문 전에 미리 연락해야 하나'하는 고민은 1도 하지 않았다. 위치만 확인한 뒤 무작정 들이닥쳤다. 본사 직원이니 가서 사정만 설명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통했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안내받았다. 방에는 본사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큐비클이 열 개 넘게 놓여 있었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유롭게 자리를 하나 잡아 노트북을 펼쳤다.


사무실에서 테헤란로가 내려다 보였다. 한국에서 살 때 수도 없이 오가던 길이었다. 아내와 코엑스에 영화를 보러 갈 때도, 쇼핑을 하러 갈 때도, 해외 출장길에 도심공항터미널로 향할 때도 이 길을 지났다. 몇 년 뒤에는 미국 회사 직원이 되어 그 길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풍경 속에 낯선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었다. 내 기억 속 그 자리는 한전 건물이었는데, 어느새 신라스테이가 서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이 동네는 계속 바뀌고 있었다.




몇 년 뒤 두 번째 회사로 옮겼다. 2022년 가을 땡스기빙 연휴에 한국을 찾았고 이번에는 아셈타워로 향했다. 글라스타워에서의 아름다운 기억은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사전에 아무런 문의를 하지 않았다. 가서 사정만 설명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데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회사가 없었다. 1층의 층별 안내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회사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주소는 분명 여기였는데. 한참 뒤에야 이유를 알았다. 당시 한국 사무실은 아셈타워 한 층에 자리한 공유오피스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 안내판에는 회사 이름이 아니라 공유오피스 업체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무실이 있는 곳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첫 회사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았다. "저... 미국 본사에서 왔는데요. 혹시 여기서 며칠 일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순간 당황하는 게 보였다.


첫 회사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일이, 이곳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어느날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자리하나 달라고 하면 나라도 그랬을 듯. 다행히 어드민 역할을 함께 맡고 있던 분이 상황을 듣고 웃으며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셨다. 마침 비어 있는 바카라상이 있다고 했다.


위치는 사무실 정중앙이었다.


숨어서 조용히 일하기에는 최악의 자리였다. 대신 사람을 사귀기에는 최고의 자리였다. 오가는 사람들과 자주 눈이 마주쳤고, 겸사겸사 먼저 인사하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갔다. 회사 경비로 처리할 수 있다며 번번이 내 몫까지 챙겨줬다. 얻어먹기만 하기가 미안해 나는 가끔 커피를 샀다.


첫 회사에서는 몇 주를 일하고도 원래 알던 지인 말고는 새로 사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두 번째 회사에서는 며칠 만에 여러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됐다. 아무 준비 없이 들이닥쳐 사무실 한가운데 자리를 얻은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특히 처음 자리를 마련해준 어드민 분과는 이후에도 인연이 이어졌다. 몇 년 뒤 내가 다시 회사를 옮긴 후 한국을 찾았을 때도 연락해 함께 밥을 먹었다. 생각해보면 세 회사 중 들어가기 가장 힘들었던 사무실에서, 가장 많은 인연이 남았다.


6fd2f4a9-0ff4-487c-90a9-891dd79224b0.png아셈타워에 위치한 두번째 회사에서 본 풍경. 한강 뷰가 운치있다. (예나빠 촬영, 2022년).



이곳에서는 탕비실도 조금 독특했다. 공유오피스라 여러 회사가 함께 쓰는 공간이었는데, 커피머신은 무료였다. 대신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마시면 옆에 놓인 종이에 소속과 이름, 무엇을 먹었는지 적어야 했다. 처음에는 나도 착실하게 적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속' 칸에서 손이 멈췄다. 나는 이 회사 직원은 맞다. 그런데 한국법인 직원은 아니었다. 미국 본사라고 적어야 하나, 한국법인이라고 적어야 하나. 음료수 한 병을 앞에 두고 갑자기 내 소속이 애매해졌다. 혹시 나중에 누군가 명세서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 인간, 사무실 자리까지 내주고, 밥도 사줬는데, 여기서 음료수까지 까먹었네?"


순간 움찔했다. 미국 본사라고 적자니 괜히 거창하고, 한국법인이라고 적자니 거짓말 같았다. 별것 아닌 음료수 한 병 때문에 갑자기 내 정체를 설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던 나는 2024년 여름에도 같은 사무실을 찾았다. 이번에는 처음처럼 낯선 손님이 아니었다. 먼저 아는 얼굴들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했다. 처음에는 회사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헤맸는데, 두 번째 방문 때는 내가 먼저 아는 사람을 찾아갔다.




세 번째 회사에서는 두 번째 회사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매니저에게 허락도 받았다. 공교롭게도 매니저가 출장차 한국 법인을 방문한 적도 있어, 오히려 사무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방문하기 한달전부터 미국에서 메일로 문의를 했고, 매니저도 아는 한국 직원에게 추가 메일까지 보내 주었다.


흔히들 '무역센터'라고 부르는 트레이드타워는 앞서 두 회사보다도 익숙한 곳이었다. 코엑스를 오갈 때마다 수없이 올려다봤던 건물. 그런데 이번에는 그 높은 곳 어딘가에 내가 다니는 회사의 한국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잠깐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회사에 다닐 때 외국계 회사를 기웃거리며 이곳에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본사 직원으로 이곳에 오다니. 기분이 묘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드민을 맡고 계신 분이 미리 자리를 하나 마련해 두셨고, 바카라상에는 심지어 내 이름표까지 붙어 있었다.


'오... 내 자리다.'


두 번째 회사에서 아무 준비 없이 들이닥쳐 빈 바카라상을 겨우 얻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은 역시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사무실 자체도 앞선 두 곳과 또 달랐다. 독립된 탕비실에는 커피와 음료, 간식, 과일까지 제법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커피를 뽑으러 갔다가 익숙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커피머신이 미국 본사에서 쓰던 것과 똑같았다. 멀리 한국까지 와서 본사와 똑같은 커피머신을 보고 반가워할 줄은.


'그래. 여기도 우리 회사구나.'


반면 사람들과 어울릴 일은 많지 않았다. 주변에는 한국 직원들이 앉아 있었지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다들 각자 알아서 움직였다. 나도 대부분 혼자 먹었다. 덕분에 코엑스 지하 식당가 맛집을 두루두루 알게 되었다. '한국이 그새 물가가 많이 올랐네'라고 느낀 건 덤.


그렇다고 불편하거나 서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혼자 조용히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는 꽤 편했다. 다만 두 번째 회사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과 밥을 먹고 친해졌던 경험과는 확실히 달랐다. 돌아오는 날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저것 챙겨주신 어드민에게 인사를 했다. 참 싹싹하고 일도 잘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혼자 노트북을 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매니저와 정식으로 출장 올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쉬운 게 하나 있었다. 이번에는 창밖 사진을 찍지 않았다. 첫 번째 회사에서는 테헤란로를, 두 번째 회사에서는 멀리 한강까지 보이는 풍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 세 번째 회사에서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몇 년 뒤 세 사무실 이야기를 한데 묶어 글로 쓰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다닌 세 회사의 본사는 모두 산타클라라 근처에 있었다. 두 번 이직했지만 출근 동네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글라스타워, 아셈타워, 트레이드타워. 회사는 세 번 달라졌는데 나는 계속 삼성역으로 출근했다. 아쉽게도 세 번째 사무실에서는 창밖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때는 이 세 곳을 한데 묶어 글로 쓰게 될 줄 몰랐다. 다음에 한국 사무실에서 일할 일이 생기면 잊지 말아야겠다.


이번에는 일단 창밖부터 찍어두자.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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