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싼 와인은 정말 더 맛있을까

by세라비
와인.png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입니다


그 맥주는 왜 특별했을까

자주 가는 단골 바가 있다. 어느 날 매니저가 슬쩍 다가오더니 맥주 한 잔을 내려놓았다.

“이거 진짜 비싼 거예요. 다른 손님들한텐 비밀이에요.”

목소리를 낮춘 그의 표정은 거의 공범의 그것이었다.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말하면 혀끝에 닿은 맛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실수록 왠지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탄산이 더 섬세한 것 같았고, 끝맛이 조금 더 깊은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맥주는 무알콜 맥주였다.

알코올도 없고, 보통은 맥주 코너에서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 그 무알콜 맥주.

매니저의 장난에 한참을 웃었지만, 웃음이 가라앉자 질문 하나가 남았다.

나는 그때 정말로 '특별한 맛'을 느꼈던 걸까, 아니면 특별하다고 믿었을 뿐일까?


광고 일을 16년 하면서 수없이 들어온 말이 있다.

“소비자는 제품이 아니라 이미지를 산다.”

그런데 심리학과 뇌과학 연구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이미지는 단지 구매 결정을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품을 경험하는 감각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와인, 다른 가격표, 다른 뇌

2008년 칼텍(Caltech)의 힐케 플라스만(Hilke Plassmann)과 동료들은 이 질문을 fMRI 스캐너 안으로 가져갔다. 참가자들은 스캐너에 누운 채 여러 와인을 맛보았는데, 실제로는 같은 와인에 서로 다른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예를 들어 90달러짜리 와인이 어떤 때는 90달러로, 어떤 때는 10달러로 제시됐다. 5달러짜리 와인은 45달러로 둔갑하기도 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가격표가 비쌀수록 참가자들은 같은 와인을 더 맛있다고 평가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다.

비싸다고 믿은 와인을 마실 때, 쾌감을 처리하는 것으로 알려진 뇌 영역인 내측 안와전두피질(mOFC)의 활동도 함께 높아졌다.

이 결과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사람들이 체면 때문에, 혹은 비싼 걸 좋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점수를 높게 준 것이라면 뇌의 쾌감 반응까지 달라질 이유는 없다. 그런데 뇌가 실제로 ’더 좋은 경험’에 가깝게 반응했다. 가격은 판단을 바꾼 것을 넘어, 경험 그 자체에 스며든 셈이다.

9년 뒤인 2017년, 플라스만은 리안 슈미트(Liane Schmidt) 등 독일 본 대학 연구진과 함께 이 현상을 다시 들여다봤다. 이번에는 같은 와인에 3유로, 6유로, 18유로의 가격을 무작위로 붙였다. 결과는 같았다.

더 정교한 분석을 통해 연구진은 뇌의 가치 평가 시스템(복내측 전전두피질과 복측 선조체)이 가격 정보와 맛의 쾌감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참가자가 실제로 와인값을 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효과는 비슷하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마케팅 플라시보 효과(marketing placebo effect). 가짜 약이 진짜 통증을 줄이듯, 가격표라는 ’정보’가 진짜 맛의 경험을 바꾼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7년 연구에서 이 효과에 관여한 뇌 영역은 통증 플라시보 연구에서 발견된 영역들과 겹쳤다.


할인받은 에너지드링크는 머리를 덜 맑게 한다

가격이 ’맛’만 바꾸는 걸까?

스탠퍼드의 바바 시브(Baba Shiv)와 동료들은 2005년에 더 대담한 질문을 던졌다.

가격이 제품의 실제 효능까지 바꿀 수 있을까?

실험에 쓰인 건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광고하는 에너지드링크였다. 한 그룹에는 정가인 2.89달러에 샀다고 알려주었고, 다른 그룹에는 같은 음료를 0.89달러에 할인받아 샀다고 알려주었다. 그다음 모두에게 단어 퍼즐을 풀게 했다.

할인가 그룹은 정가 그룹보다 퍼즐을 더 적게 풀었다. 똑같은 음료를 마셨는데도 말이다. 운동 실험에서도 비슷했다. 할인가 그룹은 운동 강도를 더 낮게 느꼈고, 더 피곤하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이 효과가 소비자의 ’기대’를 통해 일어나며, 그 과정이 대부분 의식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싼 건 덜 듣겠지”라는 생각을 스스로 떠올리지 않아도, 가격 정보는 조용히 기대를 낮추고 그 기대가 실제 수행을 끌어내린다. 플라스만의 와인이 ’느낌’의 문제였다면, 시브의 에너지드링크는 ’성과’의 문제였다.


언제 알았느냐가 맛을 정한다

내 무알콜 맥주 사건에는 중요한 디테일이 하나 더 있다.

나는 ’비싼 맥주’라는 말을 마시기 전에 들었고, ’무알콜’이라는 진실은 다 마신 뒤에 알았다.

이 순서가 의미가 있을까?

MIT의 레너드 리(Leonard Lee)와 동료들이 2006년에 한 실험이 바로 이 질문에 답한다.

연구진은 보스턴 근교 두 곳의 펍에서 손님 약 400명에게 맥주 두 잔을 맛보게 했다.

하나는 평범한 맥주, 다른 하나는 발사믹 식초 몇 방울을 섞은 ’MIT 브루’였다.

손님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신 그룹, 마시기 전에 식초가 들었다는 걸 들은 그룹, 마신 직후 평가하기 전에 들은 그룹. 아무것도 모른 그룹에서는 식초 맥주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식초 사실을 마시기 전에 들은 그룹에서만 선호가 크게 떨어졌다.

마신 뒤에 들은 그룹은 아무것도 모른 그룹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의 해석은 이렇다. 정보는 경험을 ’사후에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자체’를 바꾼다.

그리고 그러려면 정보가 경험보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

내 맥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비싼 맥주’라는 정보는 첫 모금보다 먼저 도착했고, 그래서 내 경험을 바꿀 수 있었다. 반면 ’무알콜’이라는 정보는 이미 마신 뒤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 저녁의 특별했던 기분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웃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뇌는 맛을 느끼기 전에 예측한다

세 연구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보인다. 우리 뇌는 감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계가 아니며,

먼저 예측하고 그 예측에 맞춰 경험을 만들어내는 기관에 가깝다. 가격, 브랜드, 누군가의 귓속말은 그 예측의 재료가 된다.

내 바 일화에는 재료가 하나 더 있었다. ’비밀’이라는 희소성, 그리고 오래 알고 지낸 매니저에 대한 신뢰. 이 경험이 유독 강렬했던 건 가격 하나가 아니라 여러 신호가 한 방향으로 격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연구로 확인된 것이 아니라 나의 추측이지만, 다음 글들에서 하나씩 짚어볼 만한 주제다.

다만 이 연구들이 말하지 않는 것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비싼 제품이 실제로 더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연구들은 같은 제품을 다르게 믿게 했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본 것이다.

소비자가 '속는 바보’라는 뜻도 아니다. 기대를 경험에 반영하는 건 대부분의 상황에서 꽤 합리적인 뇌의 작동 방식이다.

실험실의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크기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2008년 연구의 참가자들은 와인 전문가가 아니었고, 2017년 연구에서는 금전적 보상에 뇌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일수록 효과가 컸다. 개인차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 연구들의 결론은 “소비자를 속여라”가 아니라 “경험은 제품 바깥에서도 만들어진다”에 가깝다.


[현장 노트]

광고는 첫 모금보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

광고 대행사의 AE로 일하며 이 연구들을 다시 읽으면, 몇 가지가 다르게 보인다.

첫째, 할인은 매출만 깎지 않는다. 프로모션 회의에서 할인율은 늘 숫자의 문제로 다뤄진다. 그런데 시브의 연구가 맞다면, 할인은 소비자가 제품에서 얻는 경험의 크기까지 깎을 수 있다.

특히 효능이 중요한 카테고리, 예를 들어 건강기능식품이나 기능성 화장품이라면 더 그렇다.

둘째, 커뮤니케이션의 타이밍이 경험을 설계한다. 식초 맥주 실험이 보여주듯 정보는 경험보다 먼저 와야 힘을 갖는다. 패키지, 매장 POP, 첫 화면의 문구, 서빙하며 건네는 한마디는 모두 첫 모금 이전의 순간이다. 광고의 일은 구매 버튼 앞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용 경험의 첫 순간까지 이어진다.

셋째, 기대를 만들었다면 감당해야 한다. 플라시보 효과는 기대와 실제의 차이가 너무 크면 무너진다. 과장된 약속은 단기적으로 경험을 끌어올려도, 결국 실망과 리뷰를 돌아온다. 좋은 브랜딩은 제품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기대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일이다.


그 날 바의 매니저는 어쩌면 탁월한 마케터였다. 가격, 희소성, 신뢰라는 세 가지 신호를 첫 모금 직전에 정확히 건넸으니까. 그리고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내가 화가 나는 대신 웃을 수 있었던 건, 그 관계가 이미 단골이라는 신뢰 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Plassmann, H., O’Doherty, J., Shiv, B., & Rangel, A. (2008). Marketing actions can modulate neural representations of experienced pleasantness. PNAS, 105(3), 1050–1054. 링크


Schmidt, L., Skvortsova, V., Kullen, C., Weber, B., & Plassmann, H. (2017). How context alters value: The brain’s valuation and affective regulation system link price cues to experienced taste pleasantness. Scientific Reports, 7. 링크


Shiv, B., Carmon, Z., & Ariely, D. (2005). Placebo effects of marketing actions: Consumers may get what they pay for. Journal of Marketing Research, 42(4), 383–393. 링크


Lee, L., Frederick, S., & Ariely, D. (2006). Try it, you’ll like it: The influence of expectation, consumption, and revelation on preferences for beer. Psychological Science, 17(12), 1054–1058.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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