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 송이 나팔꽃

그림을 만나러 가니 글이 다가오다

by정언

명절에 준비한 음식이 동이 났다. 예약한 전시를 관람하고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식당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들어서며 나는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주차장 울타리 빼곡히 나팔꽃이 피어 있었다. 울타리를 뒤덮은 잎들 사이에 작은 보랏빛 꽃들이 수백 송이는 되어 보였다. 카메라에 담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어느 꽃도 선뜻 눈이 가지 않았다. 한참 골라 몇 장을 찍고는 물러났다.

사진을 찍던 렌즈 너머로 조금 전 전시장에서 품은 물음이 겹쳐졌다.


전시장 입구에는 기념 촬영을 하는 줄이 길었다. '조선의 눈으로 조선을 그리다'라는 타이틀 옆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정선의 그림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였다. 한 달 전, 명절에 가족들과 같이 가자고 약속하고 예매해 두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정선의 그림이 정말 많았다. 한 작가의 그림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얼마나 많이 그린 걸까 하는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 속에는 같은 나무와 집, 강이 있었다. 나는 그림에 집중하지 못했다. 제목과 해설을 보면 분명 다른 곳을 그렸다고 했지만 나는 알 수 없었다. 작가의 붓이 향하는 곳에 시선을 두려고 했지만 몰입하지 못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내가 쓴 많은 글도 그게 그거인 반복으로 세상에 나와 있는 건 아닌가.

나는 전시장을 건성으로 돌고 있었다. 내가 쓴 글들의 주제와 문장을 떠올렸다. 글을 쓸 때마다 고민한 문장 하나하나가 어쩌면 읽는 사람에게는 어디서 본 듯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문득 발길을 멈추고 전시장의 그림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금강산과 관동' 전시실로 들어섰다. 입구에 금강전도가 있었다. 금강산을 바라본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자 관동명승첩이 펼쳐져 있었다. 관동의 절경이 화폭에 담겨 있었다. 나는 그림과 제목을 번갈아보다 정철의 관동별곡에 닿았다.

관동별곡 구절이 머릿속을 지나며 그림을 따라 흘렀다. 나는 구절마다 맺힌 감동과 눈으로 보는 듯한 표현을 좋아했다. 그 풍경이 실제의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들을 제는 우레러니 보니는 눈이로다'

만폭동 폭포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들리고, 눈발처럼 물보라가 날리는 풍경이 떠올랐다. 정철이 눈으로 본 풍경을 나는 마음으로 읽었다.


다시 나의 글로 생각이 이어졌다. 나는 누군가가 마음으로 읽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나팔꽃 핀 울타리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지난 여름 베란다에서 빨래 걸이를 타고 올라가며 몇 송이 피우다 만 나팔꽃이 떠올랐다. 그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울타리에 핀 나팔꽃은 흔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나는 글을 쓸 때 문장 하나를 고치고 또 고치며 며칠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글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나의 문장은 묻힐 것만 같았다.


나의 문장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마음에 깃들 수 있을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울타리를 한 번 더 돌아본다. 참 고운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