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장미, 그리고 인생의 계절

by정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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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가을이다. 마당 한편을 지키고 서 있는 두 그루의 벚나무는 어느새 잎을 거의 다 떨어뜨렸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쓸어내고 줍기를 시작한 지도 벌써 스무 날이 넘었다. 매일 아침 마당을 쓸어내리는 일손은 다소 고단하지만, 낙엽을 줍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멈추는 곳이 있다. 벚나무 바로 곁, 나지막하면서도 당당하게 자리한 우리 집 화단의 장미나무다.


이 집에 터를 잡고 장미를 심은 지 어느덧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세월의 겹을 겹겹이 두른 장미는 이제 제법 키가 크고 가지가 굵직한 한 포기의 늠름한 나무 형상을 갖추었다. 뻗어나간 가지마다 묵직하게 새겨진 옹이와 주름은 그 자체로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무게감을 묵묵히 증언하는 듯하다.


모든 나무가 옷을 벗고 겨울 채비를 서두르는 이 가을에, 그 오랜 장미나무가 거짓말처럼 다사로운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물론 오월이나 유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 피어나던 그 눈부시게 크고 화려한 자태와는 견줄 수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일까. 계절의 황혼녘에 수줍은 듯 작게, 그리고 다소 움츠리듯 조용히 피어난 지금의 장미꽃이 이상하게도 내 가슴에는 훨씬 더 깊은 울림으로 와닿는다. 봄날의 장미가 혈기와 자기표현의 눈부신 과시였다면, 가을의 장미는 지나온 삶의 풍파를 견뎌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겸손함과 깊은 안식의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그것도 이렇게 흐드러지게 많은 꽃을 피워낸 기억은 삼십 년 세월 동안 별로 없었다. 이웃 사람들은 지나가며 계절을 잊은 장미를 보고 "다 기후변화 탓"이라며 한마디씩 던지곤 한다. 온난화니 환경 변화니 하는 뉴스 속 단어들을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고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스산한 가을 마당에서 매일 아침 나를 반겨주는 어여쁜 꽃송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은은한 기쁨과 위로가 먼저 차오른다.


일흔셋. 사계절로 치자면 지금 나의 계절은 어디쯤일까. 아마도 잎을 다 떨어뜨린 저 벚나무처럼, 생의 열정과 화려함은 지나보내고 쓸쓸한 퇴장만을 남겨둔 늦가을이나 초겨울의 입구일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뜨거웠던 자아는 이제 아득한 추억이 되었고, 몸과 마음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이제는 그저 조용히 마무리를 준비해야 하는 나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곤 했던 터였다.


그런 나에게 이 가을에 핀 장미는 참으로 많은 생각과 철학적 질문을 던져준다. 만물이 시들어가는 때에, 모두가 끝이라고 말하는 계절의 끝자락에서 홀로 피어난 저 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제때를 빗겨 피어났을지언정, 장미는 자신이 피어난 계절을 탓하거나 주춤거리지 않는다. 그저 지금 주어진 햇살과 바람 속에서 자신이 가진 최선의 색과 향기를 세상에 내어놓을 뿐이다. 비록 봄날만큼 크지는 않지만, 스산한 풍경 속에서 피어났기에 그 한 송이 한 송이가 더욱 또렷하고 고귀하게 다가온다.


문득 늙어가는 나의 삶을 돌아본다. 쇠락해가는 노년이라 하여 그저 쓸쓸한 퇴장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나 역시 저 장미처럼, 인생의 가을날에 뜻밖의 예쁜 꽃 한 송이를 피워낼 수는 없는 것일까.


젊은 시절의 꽃이 능숙한 기술과 넘치는 혈기로 피워낸 화려함이었다면, 삶의 끄트머리에서 피워내는 꽃은 아마도 오랜 세월이 빚어낸 성숙함과 인내, 그리고 깊은 배려의 향기일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은 자리에 채워진 따뜻한 말 한마디, 주위 사람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미소, 그리고 지나온 삶 전체를 품어 안는 묵묵한 감사. 이런 마음들이 모여 피어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가을 장미'가 아니겠는가.


비록 대단하고 거창한 업적은 아닐지라도, 늙어가는 이 길목에서 뜻밖의 온기와 기쁨을 전할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밝혀주는 저 가을 장미처럼, 나 역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을 주는 존재로 남고 싶다.


낙엽을 줍던 손을 멈추고 다시금 장미나무를 바라본다. 묵직한 가지 끝에서 가을 바람에 살랑이는 붉은 꽃잎이 마치 나에게 "당신의 계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응원의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늦가을의 화단에서, 나는 오늘 내 삶의 피날레를 다정하고 환하게 밝혀줄 또 하나의 묘바카라을 가슴 깊이 품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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