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 인지와 정서의 불균형 속 진짜 채워야 할 것들.
요즘 교육 현장에서 만나는 부모님들에게 아이의 슬롯성은 자연스럽게 겪어내는 발달 과정이 아니라 완벽하게 기획하고 보호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되어버렸습니다.
놀이터에서 같이 놀 친구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얌전한 아이들만 모아 소수 정예의 놀이 그룹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내 아이가 행여나 상처받을까 두려운 마음에 부모가 먼저 나서서 안전한 인공 관계망을 짜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기계적으로 맞춰진 온실 속의 슬롯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완벽한 온실 안에서 아이들은 철저한 평화를 경험합니다. 장난감을 두고 다툴 기미가 보이면 어른들이 재빨리 똑같은 것을 두 개 사서 쥐여주며 갈등을 조용히 무마해 버립니다. 내 아이가 겪을 아주 작은 생채기조차 대신 막아주고 싶은 부모의 애틋한 사랑이 아이를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는 투명한 통제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이는 갈등을 겪고 스스로 타협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갈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균실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았을 뿐입니다.
이 통제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겉보기에 아주 배려심이 깊고 양보를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유아 교육 현장의 최전선에서 마주하는 이 아이들의 진짜 민낯은 몹시 위태롭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유치원 교실이나 동네 놀이터라는 통제 불가능한 야생에 던져지는 순간 아이들의 얄팍한 슬롯성은 여지없이 밑바닥을 드러냅니다. 나와 결이 다른 친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거나 거친 말투로 다가오면 아이는 그것을 유연하게 튕겨내지 못하고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져버립니다.
영재 소리를 듣는 똑똑한 아이들조차 이 복잡한 슬롯적 맥락 앞에서는 길을 잃고 맙니다. 정답이 명확한 수학 문제나 파닉스 규칙은 완벽하게 외워내지만 정해진 답이 없고 매번 변하는 타인의 마음은 도무지 읽어내지 못해 크게 당황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스스로 조율해 본 경험이 부족한 이 아이들은 자그마한 마찰 앞에서도 크게 무너져 내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드러누워 숨이 넘어갈 듯 통곡을 하거나 교실 구석에 숨어 맹렬한 불안 증세를 보입니다. 타인의 마음이라는 복잡한 과제를 건강하게 소화할 근육이 없기 때문에 아예 상황 자체를 회피해 버리는 슬픈 방어기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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