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못다 한 이야기

셋. 그렇게 영어권 나라로

by라겨울

한국에서 이력서를 100장은 넘게 뽑아왔다. 이 도시에 있는 카페에는 전부다 이력서를 돌린 것 같다. 인터넷에 공고가 올라온 곳도 안 올라온 곳도 다 넣었다. 영업이 끝난 카페도 혹시나 싶어 이력서를 문 틈 사이로 집어넣어 봤다. 너무 절실했다. 제발 아무 데서나 나한테 연락 좀 줘.


얼마 뒤, 한 곳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시내 중심가에 새로 여는 카페였다. 인터뷰를 하러 오라고 한 날 수줍게 준비한 말을 꺼냈다. 보시다시피 영어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조금 순진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참 무모하고 무바카라임한 말이 아니었나 싶은 걸 보면.


오프닝 날짜 며칠 전부터 사장과 그의 가족은 내가 커피 만드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가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가족은 내 커피를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대망의 오프닝 날. 카페 자리를 물려준 이전 주인이 축하해 주겠다고 찾아왔다. 그러다 머신 앞에서 커피를 만드는 나를 보며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가 사장에게 말했다. “쟤 영어를 못하잖아.”


내 듣기 실력이 나의 말하기 실력만큼이나 별로일 거라 생각했는지, 전 주인이 대놓고 말했다. 그러더니 커피 머신 앞에 서서 주문서를 보며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굴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찾아서 하기 위해 카페 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손님 테이블을 치우고 열심히 설거지를 했다. 내가 어떻게든 쓰임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제발 자르지만 말아줘. 뭐든 잘할 수 있으니까, 제발.'


전 주인은 커피를 만들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여기 내 가게 아니고 이제 네 가게야.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쟤 잘라야 돼. 나 전에 일하던 애들 중에 지금 시간 되는 애 있는지 찾아볼게.” 하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설거지, 청소 다 할 수 있어. 제발 자르지만 말아줘.' 너무 절실했던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다른 일을 찾아서 했다. 전 사장이 커피를 만들어 놓으면,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미소 지으며 손님에게 커피를 배달했다. 하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왠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듯한 손님들의 그 동정 어린 표정을.


그러다가 그 사람이 나에게 “Cloth”를 달라고 했다. 일을 할 때 센스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어가 되지 않는 곳에서 나의 센스는 전혀 발동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때 내가 아는 clothes는 ‘옷’뿐이었다. ‘제발 겨울아. 생각해 내. 뭘까? 뭘 달라고 하는 걸까?’ 이전 주인에게 잘 보여야 이 일자리를 잃지 않는다는 생각에 스스로 긴장하고 몰아붙일수록, 머리는 더 안 돌아갔다. 전 사장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내 옆에 있던 행주를 집어 들어 내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이걸 cloth라고 하는 거야.” 아. 나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중간중간 현 사장을 향한 전 주인의 설득이 계속 이어졌다. “너 이거 안돼. 쟤 못써. 장사 망해.” 내가 정말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이젠 상관없다고 생각한 건지 더 노골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애 한 명 지금 올 수 있대. 네가 결정만 하면 걔 부를 수 있어. 네가 결정해야 돼 이제.”


전 주인은, 손님들의 커피를 만드는 중에도 계속 현 사장에게 소리쳤다. “결정해. 지금 결정해야 돼. 나랑 같이 일하던 애 지금 당장 올 수 있대.”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이곳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걸. 일단 내가 할 말을 속으로 몇십 번 되뇌었다. 아, 이런 순간에서 조차 영어 문장 하나 곧바로 말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러고는 전 주인에게 말했다. “더 이상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나갈게.” 그 말을 들은 전 주인에게서 왜인지 안도의 미소가 비치는 것 같았다. 전 주인이 말했다 “(나 말고) 현 사장한테 가서 말해야지.”


혼이 나간 듯 서있는 현 사장에게 다가갔다. “내가 나갈게.”


그렇게 앞치마를 벗어두고 카페 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연 순간 곧바로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그렇게 우는 건 나도 처음 봤다. 10분 거리의 숙소가 왜 이리 멀게 느껴지던지. 속으로 ‘빨리빨리, 제발 비켜’를 외치며 거리의 사람들을 헤쳐나갔다.


암막 커튼을 치고 며칠을 펑펑 울었다. 다행히 내가 묵던 6인실 숙소에는 한동안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내 워킹홀리데이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솔직히 전 주인이 우려하는 부분을 나는 너무나 이해할 수 있다. 동의한다. 영어를 못하는 직원이라니, 사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누군가를 자르는 일을 웃으면서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어른스럽게 다른 방법으로 풀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카페는 시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지나쳐야 했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그렇게 3개월 만에 그 카페는 문을 닫았다.



이 글은 내가 완성한 <나의, 아마도 영어이야기> 온라인카지노북 세 번째 이야기에 넣을까 고민했던 글이다. 혹시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탓하거나, 너무 주관적이며, 자기 연민에 가득한 글을 써 내려가진 않을까 우려해 넣지 않았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카페 자리를 지날 때면 마음이 아릿했다. 어쩌면 훌훌 털고,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됐구나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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